일제 노역에도 4.3때 토벌대에도 동원된 진펭이굴 화전민 기구한 운명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⑬] 성읍리 ‘진펭이굴’ 화전
진펭이굴 화전은 지금 사이프러스골프장 4홀과 6홀 사이 냇가 일원에 있던 마을이다. 진펭이굴의 설촌에 대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일제강점기까지 10여 호의 주민이 살다가 1945년 해방될 때 3가구가 남아 있었는데,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도와 1948년 항공사진을 통해 당시 흔적이 확인될 뿐이다. 이웃한 성읍2리 구릉팟과 가시리 ‘해남굴’ 목장화전 사이에 있던 화전마을로, 주민들은 주로 피, 메밀, 팥 등을 재배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진펭이굴에 있던 집안으로는 변 씨, 한 씨 집안이 있었는데, 변 씨 집안이 가장 먼저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았다. 주민들은 소 20∼30마리와 성산, 난산, 표선 주민들이 위탁한 소를 맡아서 키웠는데, 성산 지역의 소가 가장 많았다. 한 씨 집안은 진펭이굴에서 3만여 평을 개간해 조, 피, 메일, 감자 등을 재배했다. ‘곡쇠(曲金)’를 이용해 나무로 나막신을 만들었고, 맥신(장화처럼 목이 긴 짚신)을 만들어 신었다. 나무로 솔빡, 다듬이, 도구리 등을 만들었으며, 청새(靑草)도 재배했다. 청새는 3고리로 묶어 팔았다. 홍〇순(1930생)은 한 씨 집안이 대나무로 된 그릇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고 전했다.
일본인들은 진펭이굴에 들어와 소 100여 두를 키우며 생활했었는데, 일본인이 소를 기를 당시 성읍리 사람들이 올라와 일을 해줬다. 해방 직전 변 씨 일가는 다른 마을로 이사했으며 한 씨 집안에서는 징용으로 북해도를 갔다 행방불명된 사람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 한 씨 집안 12살 한〇율(1935생)의 외사촌 형은 결혼할 즈음에 일제에 의한 징용 노역에 동원될 처지에 놓였다. 외사촌 형의 노역을 대신할 할 사람이 없자, 몸집이 켰던 한 씨는 자원하여 노역에 나섰다. 그는 대록산 서쪽 녹산장비행장(현 정석비행장 자리) 활주로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활주로 공사에 동원된 주민들은 삽, 철괴, 곡갱이 등을 이용해 돌과 흙을 캐내고, 그것을 두 사람이 목도를 이용해 옮겼다. 일제는 노무자들에 대해서는 이름을 호명치 않고 번호로 구분해 부르거나 일을 시켰다. 제주4·3 구술자료 총서 06. 『빌레목굴, 그 끝없는 어둠속에서』에는, 애월읍 광령리 진찬민(1929생) 씨가 17살 때 노무자로 진드르와 녹산장비행장 공사에 참여했다고 진술한 내용이 나온다.
해방 전 한 일본인은 변〇봉의 딸 변〇개와 혼인하여 생활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은 아내 변〇개만 두고 일본으로 돌아갔고 홀로 남은 아내는 신산리로 이주해 살았다.
진펭이굴 주변에는 일본군 대대본부가 주둔했는데, 일본군은 대록산과 소록산 기슭에 진지동굴을 파고, 시멘트로 물저장소를 만들었는다. 이들은 진펭이굴에 자주 다녀갔는데, 난산리 신〇황(1928생)은 진펭이굴 출신에게 진지동굴 받침목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목수 일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제주4·3이 일어나자 성읍1리로 이주했다는 한 씨 집안 어른은, 사슴이주둔소에 머물면서 토벌대에 도면으로 길을 안내해주며 지냈다고 증언했다. 이후 큰아들은 적악주둔소에 있으면서 토벌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진펭이굴은 현재 사이프러스골프장에 들어가 있어, 그 흔적은 냇가 일원에 자라는 대나무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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