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로망 ‘맨발로 잔디’, 막상 제주에 와보니 내 발바닥이‥

[제주 사는 키라씨 : 제주에서 7년을 살아보니 ⑭]잔디를 밟고 흙을 만지는 기쁨

오래전, 치앙마이에 사는 태국 현지 친구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태국이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라는 말만 들었는데, 사실 그 빈부격차라는 게 어떤 건지 잘 몰랐었습니다. 태국 친구와 저는 치앙마이 외곽에 있는 경비구역 2곳을 지나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다양한 모양의 멋진 이층집들이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 맨발로 놀고 있는 태국 치앙마이 어린이들(사진=키라 이금영)

친구를 따라 도착한 이층집 앞에는 벤츠와 봉고차 같은 차가 한 대씩 있습니다. 1층에는 20년째 뇌졸중으로 누워계신 친구 아빠와 2명의 간병인 아저씨가 있었고, 2층에는 친구와 친구 엄마가 함께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이른 아침, 친구 엄마가 맨발로 잔디밭을 걷고 계셨습니다. 한 손에는 머그컵을 들고서요. 그 모습이 너무 우아해 보여서 저도 따라 해봤습니다. 맨발로 잔디 밟아보기.

발바닥에 닿는 아침이슬의 촉촉함, 잔디의 폭신함과 잔디 사이 흙이 주는 부드러운 감촉. 이때 저에게 작은 소원 같은 게 생겼답니다. 나중에 꼭 잔디밭이 있는 집에 살아야지라고요. 하지만 서울집으로 돌아오면서 이 작은 소원도 희미해졌답니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흘러 우연히 제주에 살게 된 키라에게 잔디밭이 딸린 집이 생겼답니다. 제주에 와서 살던 첫 번째 집 마당은 잔디 중에서도 최고의 잔디인 ‘금잔디’가 깔려있었답니다. 예전에 마음속에 고이 접어놓았던 작은 소원을 꺼냈지요. 아침이면 맨발로 잔디밭을 밟고 하루를 시작하는 일.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 잔디밭을 걷고 있노라면 세상 바랄 게 없더라구요. 아, 이런 게 소소한 행복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지요.


▲ 제주도에 와서 비로소 맨발로 잔디를 밟는 꿈을 이뤘습니다.(사진=키라 이금영)

제가 워낙 겁이 많고, 안전제일주의자여서 단독주택에 산다는 것은 제게 모험과 같은 일이었답니다. 열쇠도 없는 제주의 집들, 가로등조차 희미한 시골 동네, 하지만 제주에 살면서 알게 되었지요. 오히려 제주 현지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는 앞집, 옆집, 뒷집 다 아는 이웃들이기에 집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안전하다는 것을요.

서울에 살 때 저 역시 경비구역을 2곳을 통과하는 50층 건물 집에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늘 위를 거닐며 하늘 위에서 잠을 자고 살았던 거예요. 하늘에 둥둥 떠서 말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할 정도랍니다.

아무래도 시골 귤밭 안에 살다 보니 이제는 쉽게 흙을 만지며 밟으며 살고 있습니다. 텃밭에 모종을 심을 때 만져지는 흙, 잡초를 뽑을 때 만져지는 흙, 맨발로 잔디밭을 밟을 때 느껴지는 흙, 귤밭에 귤 따러 갔을 때 만나는 발아래 흙. 흙을 맨발로 밟는 것과 흙을 맨손으로 만지는 것은 정말 느낌이 다르답니다. (기회가 되시면 꼭 맨발로 흙을 밟아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 매일 맨발로 잔디를 밟고 흙을 만지는 기쁨을 누리려 살고 있습니다.(사진=키라 이금영)

잔디밭을 밟으며 살아보겠다는 그 멋짐을 넘어서 이제는 흙이 주는 감촉과 더불어 땅이 주는 기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답니다. 땅을 밟고 땅 위에서 잠을 자며 사는 일이 제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요. 여전히 신기하다고 느끼는 것은 흙 속에 있던 파 뿌리를 뽑으면 시들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단지 흙 속에 있느냐, 흙 밖에 있느냐 그 차이일 뿐인데 말입니다. 누군가는 당연한 거 아니냐고 되묻겠지만, 흙과 땅이 주는 기운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새삼 알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이렇게 흙 위에 땅 위에 살고 있음에 감사한 2월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글쓴이 키라
2017년 봄부터 2023년 11월 현재 제주 서귀포 남원읍에서
제주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 그 경계에 이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음식이 야기 책방 <키라네 책부엌> 책방 사장으로,
문화도시 서귀포 책방데이 프로젝트 매니저로,
귤 따는 계절에는 동네 삼촌들과 귤 따는 이웃으로 살아갑니다.
이 글은 책 <키라네 책부엌>에서 발췌한 내용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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