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으로 내리는 비, 집을 고립시키는 폭설.. 육지것은 힘들었다

[제주 사는 키라씨 : 제주에서 7년을 살아보니 ⑧] 바람, 비, 눈과 제주 날씨와 함께 살아가는 시간

제주의 집을 지키기로 하고, 서울에 가서 짐을 정리해서 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렀습니다. 제주에 비가 많이 온다고 하니, ‘그럼 예쁜 비옷을 하나 사서 제주에서 입고 다녀야 하겠다’라고 생각했지요. 핑크색의 예쁜 비옷을 들고 제주 집에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비가 옵니다. 우산 대신 비옷을 입고 다녀야지 했는데 제주의 비는 우산도 쓸 수 없을 만큼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내립니다. 비옷을 입고 벗고 할 시간도 없을 만큼 비를 피하기 바쁩니다. 그리고 우산을 쓰나, 비옷을 입으나 옷이 젖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우아하게 비옷을 입고, 제주도 비를 맞아보겠다던 제 계획은 철부지 육지 사람의 꿈 같은 일이었지요.


▲ 키라기 예쁜 비옷 입고 청귤을 따던 날(사진=키라 이금영)

지금은 우산도 안 가지고 다닙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맞고, 집 밖에 나가지 않지요. 키라의 우아한 분홍색 비옷이 못내 아쉬워 이 비옷을 어디에 쓰지 하다가,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 여름에 텃밭에 모기가 너무 많아. 검질 맬 때 비옷 입고 검질 매면 모기에 물리지 않겠지.” 하고, 텃밭 검질 맬 때 그 우아한 비옷을 입고 잡초를 뽑았답니다. 내친김에 무농약 밭에 청귤을 따러 갔을 때도 입었더랬죠. 더운 여름날, 모기에 안 물리겠다고 비옷 입었는데, 땀이 쏟아집니다. 사우나가 필요 없네요.

그 이후로 이 비옷은 옷장 어딘가에서 나오지 못했죠. 그러다 삼촌들이랑 귤 따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모르니 비옷을 챙겨오라고 했습니다. 귤 가방 안에 이 우아한 핑크색 비옷을 챙겨갔답니다. 귤 따다 비가 오면 이 비옷을 입겠다고 말입니다. 제가 귤 가방에서 이 분홍색 비옷을 꺼냈을 때 삼촌들 얼굴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거, 무사?” 지금 생각하면 제주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육지것이 따로 없습니다.  지금도 가끔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아주 이쁜 장화를 신고 다니는 걸 보면서 혼자 웃습니다. ‘제주에 온 지 얼마 안 됐구먼, 곧 그 장화도 안 신을 걸.’ 하고 혼잣말을 합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를 듣고 집 주변에 모래주머니를 쌓던 날(사진=키라 이금영)

제주 날씨 이야기가 나왔으니, 몇 가지 에피소드를 더 나눠볼까요? 제주에서 첫 겨울,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집에 붙어있는 문들이 죄다 흔들거리기 시작합니다. 밖에서 뭔가 무서운 소리도 납니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집 밖은 위험해 보입니다. 제가 겁이 많아서 해가 지면 절대 집밖에 나오지 않는 사람인지라 문 열고 나가지도 못합니다. 무서워서 밤새 잠을 못 잤지요. 다음날 아침, 어젯밤 무슨 일이나 있었냐는 듯이 세상 고요합니다. 친하게 지내는 제주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냐고요. 그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니, 어젯밤에 전쟁이 난 것처럼 창문이 흔들리고 하던데요.”라고 했더니, 뭐, 그게 대수로운 일이라는 듯, “바람이 좀 많이 불었지.”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주의 겨울 바람은 태풍 부는 것 마냥 불어댑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여름에 태풍이 온 대도 무섭지도 않습니다. 제주 날씨에 적응했달까요? 육지사람들이 겨울밤에 부는 제주 바람에 놀라서 묻곤 하면 이제는 “뭐, 그 정도 바람 가지고 그래요?” 라며 여유도 부립니다.

처음 제주에 왔던 해, 며칠 동안 눈이 아주 많이 내렸습니다. 주변에서는 제주에 이런 날씨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집밖에 나갈 수가 없었지요. 이게 말로만 듣던 고립의 시간입니다.


▲ 폭설로 고립된 시간. 제주의 날씨에 적응하는 것은 너무 힘 들지만, 이 역시 키라에게는 좋은 경험입니다.(사진=키라 이금영) 


다행히 집에는 함께 귤 따던 삼촌들이 챙겨주신 음식이 많이 있었답니다. 며칠 동안 집에서 ‘냉장고 파먹기’를 하고 살았습니다.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려 정전이 됐던 기억이 있어 미리 양초와 가스버너도 준비해놨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보일러 기름이 똑 떨어졌습니다. 눈이 많이 내려 보일러 기름 배달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젠 눈이 많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으면 고립의 시간을 준비합니다. 마트 가서 장보기, 주유소에서 기름 한 말 사다 놓기, 가스 버너, 양초 준비해 놓기 등등.
이런 제주의 바람, 비, 눈과 함께 산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제주의 날씨와 함께 살아오면서 옷차림이 바뀌었습니다.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샤랄라 원피스 대신 바람에도 끄떡없는 몸에 붙는 옷을 입습니다. 서울에선 칼바람을 막아줄 필수 아이템이었던 구스패딩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제주의 날씨와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깨달음 중 하나는, 세상에 좋은 날씨도 나쁜 날씨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천상 농부들이 사는 마을에 살다보니, 이들에게는 비가 온다고 나쁜 날씨라 할 수 없고,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여 좋은 날씨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태풍이 오면 태풍이 오는 대로, 주변을 정리하고 대비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묵묵히 그 시간을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나 평소와 같이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 하나 자연을 탓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일상을 살아가는, 살아내는 제주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에는 좋은 날씨도 나쁜 날씨도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역시 그 어떠한 경험이든 좋은 경험, 나쁜 경험 또한 없다는 것을요.

글쓴이 키라
2017년 봄부터 2023년 11월 현재 제주 서귀포 남원읍에서
제주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 그 경계에 이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음식이야기 책방 <키라네 책부엌> 책방 사장으로,
문화도시 서귀포 책방데이 프로젝트 매니저로,
귤 따는 계절에는 동네 삼촌들과 귤 따는 이웃으로 살아갑니다.
이 글은 책 「키라네 책부엌」에서 발췌한 내용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키라 이금영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