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헐리고 남은 궤짝 하나, 그리고 아버지 영농일지

김영순 시조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문학의 전당, 2023) 발표
부재하는 이름을 부르는 사물과 풍경 펼쳐져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부재, 우수와 슬픔이 시집 전반을 지배

김영순 시인이 시조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문학의 전당, 2023)를 발표했다. 시인이 살았던 제주도, 그 속에서도 고향 의귀리를 떠오르게 하는 사물과 풍경이 펼쳐진다. 이 사물과 풍경은 각기 어머니, 아버지, 외삼촌 등 부재하는 이름을 소환하는 기억의 통로가 된다.

이제는 제사 명절 한 번에 치르자는데/ 어머닌 따로 안 불러 섭섭하다 하실 건가/ 생선이 마르던 옥상엔/ 꾸들꾸들 달빛 봉봉

-‘달빛 봉봉' 3연

제주사람에겐 옥돔만이 생선이다. 제사나 명절에 쓸 옥돔을 말리는데, 옥상에 달빛이 환하게 비췄다. 어머니는 생전에 당신 제상에 옥돔을 올려주길 원했건만, 제례가 간소화된 시대다. 달빛 보며 섭섭해 하실 어머니를 떠올린다.

남원과 조천 사이 길이 새로 나면서/ 옛집이 헐리고 나무들 잘려 나가고/ 그 많던 편백나무는 궤짝 하나로 내게 왔다.
유산에 대한 예의는 그 안쪽을 살피는 일/ 물걸레질 한번에도 아버지 냄새 흘러넘쳐/ 그 안에 영농일기장/ 내 습작노트를 넣어둔다

-‘편백나무에 대한 예의’ 3, 4연

1991년 남원과 조천을 있는 남조로가 개통했는데, 시인의 고향집이 도로에 편입돼 사라졌다. 집 주변에 편백나무가 많았는데, 그 나무로 만든 궤짝이 집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증거물이다. 그 궤짝 안에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영농일기장이 들어있고, 시인은 자신의 습작노트를 궤짝 안에 넣는다. 오래된 집은 사라졌지만, 궤짝을 통해 시인의 존재가 아버지 및 고향집의 부재와 연결된다.

억지로 잠 깨우려 벌통을 열어보니/ 소리 없이 사라진 머체골 사람처럼/ 그렇게 잠적해버렸다/ 정찰병도 안 돌아왔다
-‘꿀벌이 사라졌다’ 2연

봄에 꽃이 필 무렵이면 벌이 날갯짓을 해야 하는데, 벌통을 열어보니 벌이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벌이 사라진 장면을 4.3 때 소개되어 사라진 머체골 마을에 비유했다. 벌의 실종의 인류 멸망을 알리는 신호다. 그 멸망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화자는 밀원수를 심겠다고 한다. 벌의 부재가 오히려 희망을 향한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세상에 소중한 것의 실종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기에,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우수와 슬픔이 시집 전반을 지배한다. 그대로 어머니 돌아가시고는 유품으로 씨고구마가 남았고, 아버지 떠난 뒤에는 농사일지는 남았다. 제사를 지낸 뒤에도 젯밥은 남는다.

작품 ‘마블링’에서 남편과 이별한 친구를 만난 여고 친구들이 ‘밥은 먹고 울기로’하고 식당으로 몰려가는 건, 속물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건강하다. 아픔을 딛고 일어설 힘은, 그 슬픔 안 어디엔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2013년 《영주일보》신춘문예에 시조 부문에서 당선됐고, 같은 해 《시조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꽃과 장물아비』, 『그런 봄이 뭐라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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