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서운했지만, 보랏빛 꽃등을 밝히고 싶은 날
[주말엔 꽃] 등꽃
우리나라에 좋은 제도가 많은데 국민건강보험을 특별히 신뢰한다. 그런데 보험료가 예상 밖으로 많이 부과되는 속상한 일을 겪었다. 건강보험 지사를 방문해 자초지정을 묻고 확인하고 나오는데, 연한 보랏빛 꽃이 무더기로 휘날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서운한 마음, 그런 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국민건강보험이 없던 시절이 있다. 그땐 집안에 환자기 생기면 집이나 밭을 팔아야 하는 일이 많았다. 건강보험 제도가 도입되고, 이를 위해 의료수가제가 정착하면서 가난한 사람도 병원을 쉽게 드나들 수 있게 됐다. 건강보험제도는 우리나라 제도 가운데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대표적인 토산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난달에 건강보험 납부 고지서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건강보험료가 90만원 넘게 부과된 것. 건강보험 지사를 방문하고 담당자와 상담을 하고 나서야 자초지정을 알 수 있었다. 올해 군대에서 제대한 아들의 소득이 건강보험료 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 그러니까 운동선수로 입단할 때 받은 계약금이 아들의 소득으로 산정됐고, 그게 건강보험료에 반영됐다는 설명이다.
설명을 듣고 보니 보험료 부과는 타당했고, 지사에서 건강보험료를 납부하고 나왔다. 그렇지만 앞으로 몇 달을 이렇게 큰 보험료를 내야한다니, 무거운 마음으로 지사를 나왔다.
그런데 지사 마당에 핀 등나무 꽃. 연한 보라색 꽃이 무더기로 피어 바람에 흩날리는 풍경에 눈길이 쏠렸다. 등줄기가 그늘막 쉼터를 오르고 천장과 주변을 연한 자주색 꽃이 뒤덮고 있는 황홀한 장면, 거기에 취해 한참을 서있었다.
‘혼자서 꽃등 아래 서면/ 누군가를 위해/ 꽃등을 밝히고 깊은 마음’
이해인 시인은 ‘등꽃 아래서’에서 등꽃을 ‘꽃등’이라고 했다. 이 꽃 아래에 있으면 그만큼 마음이 밝아진다는 의미인데, 실제로 이 꽃 아래에 서면 마음이 한결 밝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등나무는 콩과의 낙엽 덩굴식물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에 자생해서 원산지는 한국과 일본으로 알려졌다. 4~5월에 꽃이 피는데, 일반적으로 꽃은 자주색이다. 흰 꽃이 피는 것도 있는데, 특별히 ‘흰 등’이라 부른다.
등나무는 한 그루에서 여러 개의 덩굴을 내고, 이들은 지지대를 감싸며 위로 자란다. 생각이나 의견이 꼬이고 얽힌 상태를 이르는 ‘갈등(葛藤)’의 어원을 이룰 정도로 한번 얽히면 풀 수 없는 게 등나무 덩굴이다.
등나무 꽃이 피는 모습은 마치 포도송이에 열매가 맺히는 것과 비슷하다. 길쭉한 꽃대에 작은 꽂자루가 나고 꽃자루마다 꽃이 맺힌다. 이런 형식을 총상꽃차례라 부르는데, 아까시아나 때죽나무가 이런 형태로 핀다.
꽃의 모양도 자세히 들어다보면 재미있다. 하얀 얼굴에서 자주색 혓바닥을 앞으로 길게 내밀었다고 해야 할까? 꽃의 구조가 단순하지 않다. 벌이 이 꽃을 좋아해서 양봉업자들은 등꽃을 밀원으로 사용한다.
꽃이 필 무렵에 새순과 함께 잎이 돋고 여름이면 잎이 무성해진다. 꽃이 진 자리에 꼬투리가 생기는데 9월에는 꼬투리 안에서 열매가 익는다. 지난해 달린 꼬투리가 아직도 줄기에 매달린 채 남아 있다.
자줏빛 꽃등이 바람에 날리는 장면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마치 나를 위해 등꽃이 피고 춤을 추나? 시인의 말대로 누군가에게 꽃등을 밝히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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