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끝이 아닌 옮겨 감, 우린 다음 세계 위해 체험 중’

[북 리뷰] 정현채의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비아북, 2018)

작년 5월 30일 장인이 돌아가셨다. 그날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장인의 임종 며칠 전 온가족이 모여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장인은 “고맙다.” 라는 마지막 말씀 딱! 한마디와 함께 손을 들어 박수를 딱! 한번 치시고 잠시 후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셨다. 평소의 성품처럼 간결한 작별인사였다. 그리고 며칠 후 좋아하시던 프랭크 시내트라의 ‘대니 보이’를 들으시며 편안한 표정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건너가셨다.


▲ 책의 표지
살아가는 동안 접하는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일 뿐이다. 우리는 뉴스에 보도되는 숱한 타인들의 죽음을 거의 매일 무심히 지켜본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나의 죽음’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한 삶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은 일상을 멈춰 세우고 삶의 의미와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아주 잠시! 죽음 이후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사후의 삶이 있을까? 죽고 나서도 나라는 존재가 계속 남아 있을까? 이런 생각들은 존재의 소멸에 대한 공포와 절망감을 갖게 한다. 그것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나의 죽음’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본능을 가진 개체만이 선택적으로 살아남아 후세에 유전자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을 막기 위한 원초적 방어기제이다. 하지만, ‘공포와 절망’만이 인간의 죽음을 수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친절히 알려주는 책이 있다.

서울대 의대 정현채 명예교수의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인 죽음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를 다룬 책이다. 죽음이란 완전한 끝이 아니며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거나 또는 다른 무언가로의 전환이라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게다가 흥미롭게도 ‘자신의 죽음’을 겪은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죽음 이후의 삶’이 있기에 이승에서의 삶은 경이로운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즉, ‘우리는 왜 살아있는 동안 잘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인간의 유한하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모든 문화권은 죽음이 완전한 끝임을 거부하는 믿음과 전략을 함께 발달시켰다. 즉, 인간은 육체 이상의 비물질적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계속 존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책은 이러한 일반적 견해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1-2장에서는 의사인 저자가 의료현장에서 겪은 다양한 죽음의 사례들을 통해 사회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죽음은 회피해야할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닥쳐올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온 생을 훌륭하게 정리하고 마무리하라는 것이다.


▲ 근사체험을 설명하는 삽화. 책에 다양한 삽화를 넣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3-4장에서는 근사체험, 종말체험 등의 사례들에서 공통적이고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근거로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의 옮겨감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것을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례가 있다고 해서 진리는 아닐 것이고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것이 믿음의 문제로 넘어가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사체험 이후 삶의 태도가 변하여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더라는 사례들은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영적인 체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 체험을 하고 있는 영적 존재이다.”
떼야르 드 샤르뎅 (이 책 p.124)

5-7장에서는 의식을 갖춘 이후의 인류가 고민해온 논쟁적 사후세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예일대의 철학교수 셰리 케이건은 사후의 삶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삶이 끝난 상태에서 삶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죽은 다음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 냉철하고 논리적인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삶의 지극한 유한성, 유일성 때문에라도 현재의 순간이 더욱더 소중하므로 현재를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도덕윤리가 성립하려면 사후생의 존재가 요청된다.”고 했다. 더불어 철학자 릴리언 휘팅 역시 “존재의 절대적인 지속성을 깨닫는 순간 현재의 삶은 가치 있는 것이 된다.”라고 했다.(p.127) 죽음은 현세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거나 내세의 삶을 규정짓는 힘을 지닌 실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배운 것을 통해서 우리의 다음 세계를 선택한다.”
리차드 바크 <갈매기의 꿈> (이 책 p.186)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종교만큼 풍부한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 카르마, 전생, 윤회 등 상상을 초월하는 개념과 디테일한 스토리들은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며 문화를 형성하고 인간의 정신과 삶을 지배해 왔다. 저자는 종교적 관점에서의 다양한 사후세계를 소개하는데 그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영적성장을 위한 기회라는데 초점을 맞춰 설명한다. 특히 환생이나 카르마는 징벌이 아니라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살고 공부하며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현세에서의 타인에 대한 배려, 사랑, 노력, 수양, 쌓아 온 지혜는 다음 생으로 가져가는 것이니 지금, 여기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겠다. 종교적 관점에서의 죽음이란 그래서 삶의 일부이며 마지막 성장을 위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죽음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것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이 책 p.234)


영화 ‘빠삐용’의 명대사가 있다. 주인공인 빠삐용의 꿈속에서 재판관들이 나타나 말한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범죄, 인생을 낭비한 죄로 너를 기소한다.” 빠삐용은 힘없이 유죄를 인정한다.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의 이 장면은 내게 충격적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책의 8-9장을 읽으며 영화 빠삐용의 대사가 계속 맴돌았다. ‘인생을 낭비한 죄’라니! 8-9장은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고 마무리해야 하는지 그 의미와 방법을 되새기게 해주는 부분이다. 책에서 인용한 19세기의 미국 사상가 랠프 윌도 에머슨의 문장이 메시지를 함축한다. “진정한 성공이란,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놓고 떠나는 것이다.”(p.243) 인간으로 태어나 삶을 부여받았으니 이왕이면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의미 있게 살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10-11장은 안락사와 자살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룬다. 현실적으로 어떤 치료로도 죽음을 막을 수 없고 고통을 멈출 수 없는 상황들이 있다. 안락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안락사, 존엄사는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권리라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우리나라의 자살 사망률은 OECD 국가 중 최상위로 인구10만 명당 25.2명에 이른다. 2시간 마다 3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꼴이다. 저자는 이런 환경에 놓인 우리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며 자살 예방을 위해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해 도착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굳이 종교적 의미 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자살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삶의 섭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본인의 예를 들어 구체적인 죽음 준비 방법을 말한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정리의 과정인 듯하다. 주변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관계 속에서의 감정을 정리하고,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하는 행위들을 통해 생애를 명료하게 정리하라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위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소멸이 아닌 옮겨감이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커다란 위안이다.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면 삶의 밀도가 높아질 것 같다.

정병욱
가톨릭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SBS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다 제주MBC에서 음악방송을 제작 진행했다. 지금은 제주농산물을 가공하는 중소기업을 운영 중이며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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