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떠난 자리에는 마르지 않는 못, 겨울인데 나무에는 꽃이 다닥다닥
[김미경의 생태문화 탐사, 오름 올라 ⑨] 마른 섬에 물을 품은 오름들(9) 돌미오름
개미탑의 붉은 단풍은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를 뿜어낼 듯
바람을 피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마주하고 싶을 때가 있다. 수산리 생태길에서 만난 돌미오름은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드는 그런 바람과 하늘과 빛이었다. 그곳은 바람을 이용한 풍력발전기 여러 대가 돌아가고 있다. 초원에 펼쳐지는 풍광은 낯설기보단 동경의 이미지를 자아내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포토스팟이 되기도 한다. 바람을 피하기보단 제대로 바람을 맞으며 즐길 수 있는 그런 장소다.
가을을 저편으로 보내기엔 아직도 아쉽다. 풀과 나무들은 이미 겨울 준비로 한창이라 물을 최대한 빨아들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놀라 달아날 벌레들조차도 볼 수 없는 그런 계절이다. 하지만 오름을 오르는 오르미들에겐 그 나름대로 그곳을 찾는 이유가 있다. 새로운 발견과 마주함으로 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자연이 줄 수 있는 또 다른 색다름일 것이다.
겨울은 어디쯤 왔을까? 갑자기 불어 닥친 한파가 지나가고 그 자리에는 붉은 송이와 어우러져 개미탑이 반겨준다. 화려하기보단 겨울에 어울리지 않은 화사함으로 눈길을 끌게 한다.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개미탑의 붉은 단풍,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를 뿜어낼 듯이 그렇게 겨울을 기다리고 나그네를 맞이한다. 그들 발길이 만들어 낸 흔적 위로.
생태계는 살아가는 방법들을 저마다 터득하며...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이미 정착한 곰솔과 사스레피나무가 시야를 가려 조망권을 뺏고 있다. 이들은 햇빛을 좋아하는 녀석들이다. 천이 과정에서 다른 종들보다 일찍 자리를 잡는다. 숲이 만들어지는 과정엔 여러 종의 교체가 이뤄진다. 특히 사스레피나무는 제주도에서도 동쪽 지역 오름에서 특이하게 우점하고 있는 모습이다. 같은 친척이면서도 다른 종인 우묵사스레피는 겨울을 맞으며 꽃을 피워 곤충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모습이 반갑기만 하다. 잎겨드랑이에 다닥다닥 다발로 피어 있는 모습에 걸음을 멈추고 암꽃일까 수꽃일까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암·수나무가 따로 있어 다음 해에 결실을 맺을 나무가 될까 확인해 봄이다. 이미 까맣게 익은 사스레피나무 열매를 호기심에 따본다. 짙은 남색의 과육과 함께 드러난 아주 작은 씨앗들, 어쩌다 이 작은 열매 안에 이렇게나 많은 씨앗을 품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그렇게 생태계는 살아가는 방법들을 저마다 터득하며 생존하고 있다.
26미터의 낮은 오름, 금백조로 수산2리 사거리에서 바라본 돌미오름, 멀리서 바라보는 모습은 형상조차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 내비게이션 없이는 환히 터져 있는 공간임에도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광활한 수산평야, 제주 최초 탐라목장 터
동에서 서쪽으로 길게 늘어져서 북쪽으로 터져 남향에서 바라보는 능선이 휘어져 보인다. 저 멀리 트인 북쪽을 바라보면 습지의 모습도 보인다. 정상 바로 아래 둥그런 분화구처럼 보이는 모습이 뚜렷하다. 하지만 헷갈린다. 오름의 형태가 원형인지 말굽형인지. 움푹 들어간 모습에 터졌다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구석이 있어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다. 자료들의 통일성이 필요할 듯하다.
멀리 성산일출봉과 우도까지 조망할 수 있는 돌미오름, 수산리 마을은 오래전 몽골인이 들어왔을 때, 드넓은 초원평야와 따뜻한 기온이 맞아 제주 최초 목장인 탐라목장을 운영하며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게 서기 1277년경이었으니 이제 747년이나 지난 이야기다. 몽골은 이곳에 목장을 운영하는 본부이자 몽골 목호(牧胡)들의 집단거주지인 아막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목축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수산평은 원(元)에서 파견된 단사관과 탐라총관부, 목호들에 의해 그 후로도 100년 가까이 탐라목장이 운영되었던 장소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말과 소, 양, 낙타, 나귀 등을 방목하며 오랜 세월 동안 탐라인들과 삶을 살았다. 백 년의 세월은 아마도 말(言)과 생활양식만 아니라 많은 것을 섞어놓았을 것이다. 이곳을 방문할 때 목축 역사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 더 뜻 깊은 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솟아나는 물과 고여 있는 물, 사막의 오아시스라는 오름 지명
탐방을 마치고 돌아 나오며, 이 분화구에서 동북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커다란 호수를 보게 되었다. 직경 50미터는 족히 되지 않을까. 그 긴 세월 수많은 가축과 들짐승의 목을 축여 주었을 터이다. 이 못은 여간해서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건조한 사막의 오아시스려니.
돌미오름의 뜻이 궁금해졌다. ‘돌미’가 무슨 뜻일까? 옛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이 작은 오름에서 어떤 점을 이름에 담았을까? 이 오름의 지명에 대해서도 역시나 설들이 난무한다. 그래도 한 가지 눈에 들어오는 설명이 있다. ‘돌’이란 고대어로 물을 뜻한다고 한다. ‘미’ 역시 물을 뜻한다고 한다. ‘돌’은 대체로 흐르는 물을, ‘미’는 샘을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못이 여간해서 마르지 않는 것은 적은 양이나마 꾸준히 스며 나오는 샘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지난 어느 해 이곳을 찾았을 때 보았던 가축 급수시설은 이곳 어디엔가 또 다른 샘도 있다는 걸 확인한 샘이다. 옛날 사람들이 이 메마른 오름에서 솟아나는 물을 얼마나 귀히 여겼을까 생각하게 한다.
돌미오름
성산읍 수산리 4535번지
표고 186.4미터, 자체높이 26미터
김미경
오름해설사, 숲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다. 오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단법인 오름인제주와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사무국장으로도 열심이다. 한림북카페 책한모금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개인 블로그를 통해 200여 편의 생태문화 관련 글과 사진을 게재해 왔다. 본 기획을 통해 수많은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마당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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