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절터를 지키는 가엽고 어여쁜 것들

[주말엔 꽃] 덩굴모밀 꽃

2010년 여름, 우리 가족은 귀촌을 결심하고 지금 살고 있는 망장포로 이사를 왔다. 가까운 곳에 옛날식 아담한 포구가 있고, 여름에 시원한 물을 내뿜는 샘이 있는 곳이다. 바다에서 늘 시원한 바람이 불고, 사람 사는 얘기가 그 바람을 타고 마을을 돌아다닌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도 잘 컸고, 우리 부부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생활하게 됐다.


▲ 절터에 남은 흔적들(사진=장태욱)

사람 사는 세상이라 이 마을에도 크고 작인 일이 벌어지게 마련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절이 불에 타던 일이다. 5년 전 여름, 근처에 사는 이웃 아우가 사찰이 불에 탄다고 알려왔다. 소방차가 출동했는데, 목조 사찰이 불에 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포구 언덕 위에 자리하던 보타사는 그렇게 재로 변하고 말았다.

지난 5월 18일, 오승철 시인 1주기 추모제에 갔다가 유고시집 한 권을 받았는데, ‘망장포 메꽃’이라는 작품에서 사라진 보타사의 흔적을 찾았다.

이생망 이생망이라/ 함부로 말하지 마라
주지 스님 큰아버지/ 절터만 남은 마을
벼랑 끝/ 갯메꽃 하나/ 허공에 피는 걸 봐라

                    -‘망장포 메꽃’ 전문


보타사를 창건한 스님이 오 시인의 큰아버지다. 이미 돌아가시고 다른 주지 스님이 부임했는데, 스님이 잠시 출타한 사이 화재가 절을 삼켰다. 오 시인은 빈 절터를 보면서 허망한 마음이 들었을 텐데, 갯메꽃 하나에 희망을 노래한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의미로 ‘이생망’을 쉽게 입에 올리는 젊은이들. 시인은 절벽 아래에서 갯메꽃이 폐허가 된 절터를 향해 오르고 있다며, 그런 말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꾸짖는다.


▲ 절터 남쪽에 있는 연못(사진=장태욱)

▲ 연못에 수련과 비단잉어가 산다.(사진=장태욱)

화재가 난 후 5년 만에 빈 절터를 찾았다. 일주문을 지나니 절터는 텅 비어있고, 잡동사니만 굴러다닌다. 비석과 범종만이 이곳이 절이 있던 자리임을 알릴 뿐이다.

그런데 절터 남쪽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조그만 연못. 연못을 수련 잎이 덮고 있고, 넓은 수련 잎 아래에서 비단잉어 여러 마리가 즐겁게 노닐고 있다. 누가 밥을 주지 않았을 텐데, 이 작고 어여쁜 것들이 해맑게 물속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염불 대신 파도소리가 들리는 이 작은 연못이 저들에겐 불국정토였을 게다.

그리고 작고 하얀 꽃이 연못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다. 좁쌀만큼 작은 것들이 뭉쳐 피었는데, 자세히 보니 덩굴모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그것도 서귀포에만 피는 것으로 알려진 야생화다. 서귀포에만 자생하기 때문에 희귀멸종위기종과 국외반출금지 식물로 등록됐는데, 지역에선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해안가 가까운 곳에 야생초처럼 자생하기 때문이다.


▲ 덩굴모밀이 연못을 감싸고 있다.(사진=장태욱)


▲ 작고 하얀 꽃들이 뭉쳐서 피기 때문에, 겉으로는 메밀꽃처럼 보인다.(사진=장태욱)

덩굴모밀 이름에 모밀이 들어간 것은, 하얀 꽃이 뭉쳐서 피는 게 메밀꽃을 닮았기 때문이다. 모밀은 ‘메밀’의 방언으로 꽤 여러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이다.

덩굴모밀은 줄기가 옆으로 뻗어나가다 가지를 내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꽃은 9~10월에 가지 끝에 여러 개의 꽃이 우산을 펼친 것처럼 뭉쳐서 핀다. 꽃은 흰색인데,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 5장을 펼친다. 꽃이 이렇게 뭉쳐서 피기 때문에, 겉으로는 메밀꽃처럼 보인다.

이 작은 꽃들이 연못 속 물고기를 위해 제 몸을 가르고 피고 있다. 가엽고 어여쁜 것들이 서로 의지하며 폐허 위에 불국정토를 만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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