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하얗게 내리고, 난 풍경화 속에 들어왔다
[주말엔 꽃] 와흘리 메밀꽃
조천읍 와흘리 너른 들판에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여행자들은 이 풍경을 사진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방문자센터에는 메밀 지름떡과 빙떡이 향긋한 냄새를 풍긴다. 이 풍경 만으로도 1주일은 행복할 것 같다.
지난 주말에 와흘리에서 열리는 메밀문화제에 다녀왔다. 공식 이름이 ‘2024 자청미 와흘메밀문화제’인데, 비가 내리는 날인데도 많은 사람이 찾아와 가을 메밀밭의 정취를 느끼고 있었다.
와흘메밀문화제는 와흘리에서 메밀 농사를 짓는 농민과 마을주민이 함께 준비하는 일종의 잔치다. 화흘메밀문화제는 봄과 가을, 두 차례 열리는데, 이번 가울 문화제는 10월 1일부터 20일까지 열린다. 잔치 치고는 상당히 긴데, 그만큼 주민의 결속이 든든하다는 증거일 테다.
오흘리는 2015년 농림축산식품부 농산어촌개발사업에 메밀마을 테마로 신청해 대상마을로 선정됐다. 그리고 2019년까지 와흘 메밀마을 농산어촌개발사업을 추진했는데, 그 과정에서 마을공동목장 부지에 2층 규모로 방문자센터를 건립하고 돌담 산책로를 갖춘 메밀밭을 조성했다. 메밀문화제를 개최해 손님을 맞을 수 있도록 환경과 조건을 마련한 것이다.
와흘리는 10만평 규모의 마을공동목장을 보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와흘메밀마을협의회(대표 김두환)가 2만평 정도의 땅에 메밀을 파종해 꽃을 피우고 메밀문화제를 개최한다. 문화제 기간에는 한라산과 오름을 병풍삼아 와흘리 메밀밭에는 하얀 메밀꽃이 팝콘 터지듯 피어오른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 봤던 풍경일까, 아니만 마음속에 품었음직한 풍경이 이곳에 펼쳐진다.
문화제 홍보물로는, 문화제가 열리는 기간, 여행자들을 위해 돌담 쌓기, 향토 메밀음식 만들기, 풋귤청 만들기, 메밀 품은 쿠키 만들기, 빙떡 만들기, 퐁낭 마을문화 탐방, 본향당 체험, 메밀베개 만들기 등 다채로운 체험행사가 준비됐다.
잔치인 만큼 가장 관심이 끌리는 건 먹거리다. 주민들이 메밀 지름떡과 빙떡을 만들어 파는데, 갂각 세 개씩 담은 한 접시에 5000원씩이다. 아내와 지름떡, 빙떡 한 접시 씩 사서 먹었는데, 시장의 맛이 아니라 농촌의 맛이다.
빙떡에서 구수한 향이 나고, 무나물에서 간이 적당히 배었고 참기름 특유의 향이 풍기는 게 옛날 먹었던 맛이다. 빙떡으로 지름떡을 만든 건 처음 먹었다. 만드는 분들도 메밀축제니까 특별하게 만드는 것인데, 찰기를 더하기 위해 메밀과 메밀을 도정할 때 껍질과 함께 나오는 ‘느쟁이’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빙떡과는 다른 찰진 느낌이 났다.
메밀문화제에서 하이라이트는 메밀밭 산책길이다. 너른 밭 사이로 좁고 야트막하나 돌담길을 만들었는데, 길이 길게 이어지기도 하고, 갈래를 치기도 하고, 원을 그리기도 하다. 이 길이 주변 언덕, 오름과 어우러져 마치 옛 그림 속에 들어온 착각이 들 정도다. 중간에 퐁낭과 포토존이 있고, 돌탑을 쌓도록 기단도 만들었으니 추억을 남기기엔 최고다.
메밀은 티베트가 원산지로 알려졌는데, 히말라야에서 처음 발견됐다. 이후 중앙아시아와 유럽, 남북아메리카로 퍼져 나가 전 세계에서 재배된다.
메밀은 제주도 신화인 '세경본풀이'에 등장하는 곡식이다. 세경본풀이에는 자청비는 고난을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하며 반란을 평정한 인물로 묘사된다. 옥황상제는 자청비의 업적을 치하할 목적으로 오곡의 씨앗을 선사했는데, 고향에 돌아와 보니 곡식 하나, 메밀이 빠져 있었다. 자청비는 다시 하늘나라로 가서 메밀 씨앗을 찾아왔다.
옛날 제주도 사람들은 처서(8월 23일 경) 3일전에 파종해서 처서에 발아시켰다. 처서가 지나 서늘해지면 잡초들도 힘을 쓰지 못해 발아시기를 맞췄다고 한다. 그리고 잎이 지고 서리가 내리는 상강(10월 23일경)을 넘겨 수확했다. 재배기간이 두 달에 불과하니 배고픔이 일상인 섬사람에게 메밀은 정말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그런데 기후가 예전 같지 않다. 늦더위가 오래 이어지고 가끔 가을비도 매섭게 내린다. 와흘리 주민들은 올해 8월 31일에 파종했는데 도중에 큰 비가 내려 흙 일부가 물에 쓸렸다고 아쉬워했다. 메밀밭 도중에 맨땅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는데, 폭우가 휩쓴 상처다.
올해는 유난히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늦게 찾아온 가을이 와흘리 너른 메밀밭에 핀 하얀 꽃으로 피었다. 그곳 정취에 취해 가족과 연인의 웃음이 꽃처럼 환하게 피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태욱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