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도 마을에도 긴 올렛담, 아직 열리지 않은 보물창고

[서귀포시 미래문화자산 ⑤] 산촌·양촌·해촌 모든 문화자산을 가진 신례리

신례리는 고려 시대에 형성되어 호촌(狐村)이라 했다. 1416년(태종 16) 정의현이 설치될 때 정의현에 속해 있던 마을이다. 1946년 제주도제가 실시될 때,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면 신례리가 되었다.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면서 남제주군이 서귀포시에 통합되어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가 되었다. 마을은 북쪽 신례1리, 남쪽 신례2리로 분리된다. 1리는 산촌과 중산간 마을의 색채가 강하고, 2리는 해양문화의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2024년 8월 말 기준으로 신례1리는 628가구에 1329명이, 신례2리에 219가구에 429명이 거주한다.


▲ 네커리퐁낭. 2021년 서귀포시 미래문화자산으로 선정됐다.(사진=장태욱)


행정구역으로 신례리는 하례리와 비슷하게 한라산국립공원 백록담 동쪽에서 시작해 바다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길게 분포한다. 한라산국립공원 내 사라오름과 성널오름에서 출발해 그 아래로 논고악, 보리악, 이승악 등 오름 군락을 거느린다.

이승악 주변에서 제주도 산촌문화 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마을공동목장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승악 남쪽에 휴애리자연생활공원과 생기악이 있는데, 이 주변 남쪽으로 농경지가 넓게 분포한다. 이 일대 농지는 대부분 감귤농원이 차지하고 있다. 여행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세히 들어다보면 많은 자산을 간직한 마을이다. 잘만 구성하면 마을여행의 메카가 될 만한 요소들이 알알이 박혀있다.

신례리 영역 안에는 생물학 분야에서 매우 가치 있는 공간이 있다. 신례리 왕벚나무 자생지인데, 이곳 왕벚나무는 제주도 자생지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1900년대 초 제주도 식물을 채집해 서양에 알렸던 에밀 타케 신부가 왕벚나무를 채집했던 장소도 관음사 주변과 신례리 자생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문학적으로 신례리는 주목받을 만한 요수를 두루 갖췄다. 근대 이전의 생산양식을 기준으로 제주도의 마을을 구분하면 산촌과 양촌, 해촌으로 구분되는데, 신례리는 드물게 이 세 가지 특성을 모두 포함한다.


▲ 신례리 행정구역 안에는 산촌의 문화자산이 많이 남았다.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신례리 왕벚나무 자생지, 화전민 집터, 이승악, 신례리 공동목장.(사진=장태욱)

■ 이승악 주변의 산촌문화
이승악 주변은 제주도 산촌문화를 엿볼 수 있는 요소가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에는 화전이 여러 군데 분포했다. 이들은 화전을 일궈 농사를 지었고, 소를 키우거나 숯을 구워 팔았다. 이들이 살았던 가옥의 흔적과 숯을 굽던 가마터가 오름 주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이승악 서쪽 숲 깊은 곳에 해그무니소라는 연못이 있는데, 과거 화전민은 이 물에 기대에 생활했다. 제주4·3 이후 화전이 사라지면서 해그무니소는 신례리 주민들이 피서하는 곳으로 각광을 받았다. 해가 질 무려 서쪽에서 비치는 해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비치면 연못은 주변 숲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이승악 북쪽 기슭에는 일본인이 파놓은 진지동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인근에 지금은 한라산둘레길이 지나는데, 그 출발은 일제가 개설한 하치마키 도로였다. 일제는 한라산 기슭에 표고장을 개설하고 재배한 표고를 산지항으로 운송했다. 그 일을 편하게 하려고 개설한 게 하치마키 도로인데,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한라산을 전초기지로 삼고 이 도로를 군사용으로 사용했다.

이승악 남쪽에는 마을공동목장이 펼쳐진다. 마을목장조합 소유인데, 면적이 58만평에 이를 정도로 광활하다. 목장 길 사이로 봄이면 벚꽃이 화사하게 피고, 가을이면 소 울음과 함께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 이승악 주변에 남아 있는 자산들.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해그무니소, 숯가마터, 이승악 산책로, 일본군 진지동굴(사진=장태욱)

■ 양촌 신례1리
마을목장 남쪽으로 내려오면 신례1리 마을이 나온다. 중산간마을, 양촌의 특성이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여행객들이 먼저 갈만한 곳은 양금석 가옥이다. 과거 제주도의원을 지냈던 양금석 씨 가족이 소유한 집인데, 제주도 전통초가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2000제곱미터 대지에 자리 잡은 양씨 종가인데, 안커리와 밖커리, 모커리 등 디긋(ㄷ) 자 모양이다. 모커리 옆에 통시가 있는데, 옛날처럼 돼지가 살지는 않는다.

양금석 가옥 서쪽 200미터 거리에 과거 신례1리의 중심이던 네커리가 있는데, 그곳에 오래된 팽나무 두 그루가 있다. 예전에는 나무 아래 돌 평상이 있었다. 주민이 나무 아래서 더위를 식혔고, 나그네가 길을 지나다 잠시 쉬어가기도 했다. 1974년 새마을운동 모범 마을로 선정됐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마을을 방문해 이곳에서 주민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시설된 공동수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 문화적 상징성으로 2021년 서귀포시 미래문화자산에 선정됐다.


▲ 양금석 가옥(사진=장태욱)

‘올레’란 대로에서 집까지 연결하는 골목을 의미하는 제주 방언이다. 신례1리에는 약 120m의 길이를 가진 천수왓 올레가 남아있는데, 제주에서 가장 긴 올레로 추정된다. 올레의 양옆으로 쌓은 올렛담은 가장 아래에 작은 돌을 쌓고 그 위에 큰 돌을, 맨 위에 중간 크기의 돌을 쌓은 형태이다. 과거 제주도사람들이 돌담을 쌓았던 방식을 보여주는 곳이다.

■ 물이 풍부한 공천포
공천포는 신례2리의 포구 이름이자 이 포구 일대에 형성된 동네이름이다. 공천포 산이물은 신례천이 바다에 이르기 전에 냇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 연못으로, 물이 귀하던 시절 생활용수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산이물은 여름에 인근 마을 주민들이 냉수욕을 하는 피서지로 각광받는다. 남탕과 여탕이 암묵적으로 나뉜다.


▲ 신례리 산이물(사진=장태욱)

위미농협 주유소 서쪽 가까운 곳에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인 신례리 지석묘가 있다. 인근에 위미리 넙빌레와 신례1리 산이물이 있었다. 또, 농사에 유리한 비옥한 땅이 있고, 바다에 해산물이 있어서 생존에도 유리했을 것이다.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과거 신례1리 해안은 검은 모래로 뒤덮여 있었다. 그 검은 모래 틈으로 맑은 지수사 연중 펑펑 솟았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검은모래가 점점 유실돼서 자갈과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일대 어르신들은 과거 공천포 검은모래 해변에서 피서를 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 ‘서귀포시문화도시센터’와 ‘서귀포사람들’이 지역 파트너쉽 사업으로 작성한 기획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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