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섬이 숙명인 사람들, 그 안에 숨 쉬는 신들의 서사

[북 리뷰] 강순희 글, 신지민 그림 『제주 신화의 숲, 문화소로 걷다』(한그루, 2023)

어느 마케팅 전문가는 백화점을 신들의 놀이터이자 신들의 박물관이라 표현했다. 백화점 문을 들어서면 에르메스를 시작으로 제우스, 헤라, 미네르바 등 신화에서 이름을 따온 브랜드가 줄지어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은 현대화된 신전인 셈이다. 분명 오래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신화의 현재성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현재성을 통해 신화 속의 신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책의 표지
심리학자 카를 융은 신화에는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원형들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신화에서 그 원형들을 꺼내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신화 생성의 초창기에는 훨씬 다양하고 많은 이야기가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아 전해오는 것들에는 바로 인간 정신의 보편성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강순희 작가의 『제주신화의 숲』은 제주사람들의 정신에 깃든 보편성을 담고 있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이다. 작가는 이 오래된 이야기들에 담긴 문화소와 신화소의 분석을 통해 제주신화가 어떻게 현재성을 띠고 살아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은 <죽음-탄생-생존-치유>의 순환구조를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맨 앞부분에 죽음을 다루는 <원천강본풀이>를 배치한 것은 신화와 종교의 근원적 탄생 배경이 ‘죽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차별화 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삶의 유한성을 안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에 희망으로 맞서기 위해 인간은 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원천강본풀이>는 죽음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자식이 부모에게 가는 길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탄생이고 하나는 죽음. 이승에 있는 부모에게 갈 때는 탄생이고, 저승에 있는 부모에게 갈 때는 죽음이 아닐까요?’(p.29)

죽음이 필연임을 받아들였다면 그것을 현실에서 다루는 방법으로서의 장례질서를 확립하는 일 역시 필요했을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의 죽음을 일관되게 처리해야 하는 문화적 규범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심방의 입을 통해 전승된다.

<눈미불돗당본풀이>는 인간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 역시 하늘이 주관하여 보살펴야만 할 중대한 일이었음을 알려준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 자연적인 출산의 과정은 위험투성이였을 테니 성공적인 출산은 신의 영역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며 죽는 날까지 밥벌이를 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작가는 ‘밥을 위한 여러 갈래 길’로 농업, 목축, 어업의 상징적 이야기를 담은 <세경본풀이>, <삼달리본향당풀이>, <고내리당본풀이>를 들려준다.

제주신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자청비가 주인공인 <세경본풀이>는 자연의 섭리에 따른 농사의 순환주기를 알려주는 농업교과서이기도 했다.

<삼달리본향당본풀이>에서는 과거 밭농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일소에 대한 질서를 신앙적 차원으로까지 확대한’(p.217) 농경문화를 보여준다.

‘소가 병들거나 잃어버리게 되면 그 주인이 당에 찾아가 제를 올리며 기원을 드렸다.’(p.217).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신에게 제를 올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해방적 행위였고 매우 기발하고 능동적인 해법이었을 것이다.

<고내리당본풀이>는 어업에 대한 지혜의 전승이다. 삼별초와 김통정 장군의 역사적 이야기를 끌어와 ‘먼 곳에서 오는 이동성 대어류’(p.233)를 낚는 시기를 알려주고 관련된 어로기술들을 전해준다.

<지장본풀이>는 살면서 반드시 맞닥뜨리게 되는 질병과 치유의 해법을 전한다. 옛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을 전염병이나 각종 질병으로부터 치유의 손길이 되어주었던 ‘지장아기씨’ 이야기가 흥미롭다. 여기에는 불교적인 소재가 스며들어 있다.

'불교의 지장보살은 지옥 중생을 모두 다 제도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성자이지요. 수없이 죽어가는 병자를 위해 전새남굿을 한 지장아기씨의 모습과 닮지 않았나요?' (p.281)

불교의 지장보살이 신화 속 민간신앙으로 들어와 치유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인간의 감정과 자연의 질서를 분야별로 관장하는 의인화된 신들이다. 제주신화 역시 '인간의 문화질서를 신의 서사로 드러낸 이야기다. 신화는 우리에게 신의 얼굴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인간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p.336) 신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야기이며 신들은 인간의 본성이 투영된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힘 앞에 <그때-거기-그들>은 한없이 겁에 질리고 무력했다. 인과관계에 의한 설명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신과 상상의 존재들에게 운명을 맡기는 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비현실적이지만 서사적 스펙터클이 가득한 흥미로운 문화적 실체로 남아 불확실한 현실에 대응하는 행동원칙이 되었다.

‘신화는 문화를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힘이다.’(p.386)

제주신화는 인간생존과 직결되는 자연의 원초적 질서를 해설한 지혜의 서사이다. 『제주신화의 숲』은 현재의 모습을 신화라는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봄으로써 제주문화의 뿌리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하는 훌륭한 길잡이이다. 일만팔천 신들의 땅 제주를 알고자하면 제주신화의 숲길을 걸어보자.


저자 소개
강순희 :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숲길과 책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며, 제주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제주신화의 새로운 해석 연구를 꾸준히 하고 있다.
신지민 : 제주에서 타어나 문헌정보학을 전공했다. 일본어를 공부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정병욱

가톨릭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SBS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다 제주MBC에서 음악방송을 제작 진행했다. 지금은 제주농산물을 가공하는 중소기업을 운영 중이며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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