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얼굴과 긴 속눈썹.. 어찌 이리도 어여쁘고 기특할까?

[주말엔 꽃] 누리장나무 꽃

여름 휴가철이라 제주도를 찾는 여행객이 많아졌다. 서울에 기반을 둔 언론사들이 제주도가 여행지로 매력을 상실했다고 습관적으로 보도하지만, 이 계절 제주도 구석구석은 여행객으로 넘친다.

더운 시기에 제주도를 찾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있는데,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폭포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시절 천지연폭포나 정방폭포를 가면,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천지연폭포는 웅장한 낙수, 폭포수가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시원한 물줄기, 입구에서 폭포에 이르는 천연 난대림 등 여름철 무더위를 날릴 만한 매력을 두루 갖췄다.


▲ 누리장나무 꽃(사진=장태욱)

평일 오후 이글거리는 햇빛을 받으며 천지연폭포로 갔다. 진입로 주변 나무들이 뿜어내는 서늘한 공기로 몸을 식히고 떨어지는 폭포수의 웅장한 소리로 마음을 채우면 삶의 의욕을 되살릴 수 있다. 이 폭포는 여행객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욕을 채워주는 활력소와 같다.

산책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해송과 왕벚나무, 후박나무, 먼나무, 구실잣밤나무 등 큰 나무들이 길가에서 숲을 이루고 있다. 폭포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주변을 식혀주는데, 천연난대림이 시원한 그늘까지 만들어주니 주변은 늘 서늘한 공기가 머문다.

천지연 산책로에 하천을 가로지르는 ‘기원의 다리’가 있는데, 다리 옆에 하얀 꽃이 눈길을 끈다. 암술과 수술이 마치 미인의 속눈썹을 연상시킬 만큼 밖으로 길게 뻗어 나왔고, 꽃잎 아래에는 주머니 같은 대롱이 달렸다. 참으로 앙증맞고 신기한 모양인데, 누리장나무 꽃이다.

누리장나무는 우리나라 제주도와 울릉도, 남부지방, 중부지방의 산야지, 산기슭, 하천변, 해안가 등에서 자라는 자생수목이다. 일본, 대만, 중국에도 널리 분포한다.


▲ 천지연폭포 산책로 '기원의 다리' 주변에서 누리장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웠다.(사진=장태욱)

누리장나무 이름은 잎에서 누릿한 장 냄새가 나기 때문에 붙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누릿한 냄새가 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전역에 자생하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강원도에서는 구릿대나무, 경상남도에서는 누룬나무, 전라도에서는 피나무, 제주도에서는 개똥낭이라 불렀다. 꽃에서는 진하지는 않지만 향긋한 향기도 나는데, 왜 이런 이름들을 붙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마도 꽃의 아름다움을 시기한 여인이 붙인 것은 아닐까?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찾아오면 나무는 꽃잎을 펼친다. 꽃잎은 5장인데, 마치 선풍기 날개처럼 약간 비틀린 모양이다. 꽃잎에서 암술과 수술이 나오는 모양과 방향이 독특하다. 암술 한 자루가 길게 뻗어 나오면, 뒤에 수술 네 자루가 나온다. 그런데 암술이 하늘을 향하면 수술이 아래로 향하고, 암술이 아래를 향하면 수술은 하늘을 향한다. 자가수분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딴 곳을 향하는 것이다.

꽃잎 아래는 붉은색 대롱을 달고 있다. 열매는 동그란 모양이며 푸른색 혹은 보라색 익는다. 붉은색의 꽃받침에 싸여 있는 것이 자색 열매와 대조를 이루며 보석 같은 형태를 띤다.

이름만 들으면 효용이 별로 없을 것 같은 나무지만, 조상들은 이 나무를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했다.


▲ 누리장나무 꽃(사진=장태욱)

우선, 한방에선 누리장나무의 잎과 꽃, 열매, 즙 등을 모두 약재로 사용했다. 한약명으로는 잎을 취오동, 해주상산(海洲常山), 해동(海桐), 눈엽상산(嫩葉常山)으로, 꽃은 취오동화(臭梧桐花), 과실은 최오동자(臭梧桐子), 암동자(岩桐子)라고 불렀다. 그리고 뿌리를 짓찧어서 만든 끈적끈적한 즙은 토아위(土阿魏)라고 했다. 부르는 이름이 많은 만큼 효용도 다양했다.

조상들은 누리장나무의 어린잎을 살짝 데쳐 찬물로 누린내를 우려낸 후 나물로 해서 먹었다. 그리고 가을에 달리는 남색열매는 염료로 사용해 글씨나 그림을 그리는 천연물감으로 사용했다. 누리장나무를 울타리 용도로 심기도 했다. 야생동물들이 잎을 뜯어먹고 줄기를 갉아먹어도 생장이 왕성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우리 땅에서 우리 역사와 함께 했던 누리장나무, 그 나무가 최남단 도시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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