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당의 볍씨가 기름진 덕천 들녘에 이르니 여문 곡석, 문곡성

[신화의 숲, 문화소로 걷다 ③] 덕천 금산당, 금백조의 여문 곡식을 모시는 당

송당 본향당은 금백조와 소천국을 모시는 당으로, 제주도 무속의 고향과도 같다. 송당이라는 지명으로 쌀에서 유래했고, 금백조는 쌀 품종의 한 가지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지난 편 기사에 제시했다. 그리고 거멀(덕천)은 금백조의 아들 문국성을 모시는 마을인데, 이 또한 곡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도 제시했다.


▲ 웃송당에서 덕천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이정표(사진=장태욱)

쌀농사 우두머리는 송당에서 수확한 벼에서 튼튼하게 잘 여문 종자를 골라내었다. 맨 처음 종자라 그들에겐 큰아들이었다. 벼를 수확한 감격을 생각하며, ‘여문 곡식(種子)’이라는 의미로 ‘문곡석’이란 이름도 지었다. 그들은 종자를 모시고 더 좋은 경작지를 찾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웃송당 서북쪽 근처에서 ‘거멀’을 만났다.
거멀은 땅속이 패어 굴을 이루면서 굴 입구나 주변이 상록수로 우거진 곳이다. 곶자왈이 펼쳐지는 끝자락에는 너른 평지 사이로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그들은 물 근처의 땅을 개간하였다. 볍씨를 뿌렸고, 문곡석을 모시는 제단(祭壇)도 만들었다. 후에 사람들은 그 물을 모사니물(볏모를 살리는 물)이라 불렀다. 문곡석은 문곡성으로 후에 문국성이 되었다. 후손들은 그 당을 ‘금백조 쌀당’이라는 의미로 금산당이라 불렀다.


내가 세운 가설을 입증해 줄 문헌 자료가 없어, 인지적 추론에 따라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보았다. 그 후 송당에서 출발한 볍씨는 제주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경작지를 넓혀 나갔을 것이다. 경작지는 안정적인 정착의 기본이다. 정착을 하면 당(堂)을 설립하고 가장 웃봉의 쌀로 신께 제사를 지냈을 거다.


▲ 덕천의 옛이름은 '금물흘'이었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제주삼현도에 나타난 송당과 금물흘이다.(자료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 소장)

덕천리를 찾은 날 마을은 조용하였다. 농사 트럭이 마을길을 바삐 달릴 뿐이었다. 금산당 입구는 쇠락해 보였지만 제단에 걸린 물색은 여전히 신앙민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17세기 말 제작된 『탐라도』에 거멀은 ‘금물흘촌(今勿屹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18세기 전반까지 금물흘촌은 행정상 송당리에 속했다. 18세기 중엽 제작된 『제주삼현도』에는 마을 명칭이 촌에서 리로 바뀌었다. 그 후 1872년 『제주삼읍전도』에는 ‘덕천리(德泉里)’로 표기되어 지금에 이른다.

버스 정류소에서 만난 주민 박천길 어르신(남, 1936년생)은 유채 농사와 축산을 주로 하였다고 한다. 당에 다녔던 기억이 까마득하여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강숙렬 어르신(여, 1935년생)은 덕천리에는 고양부 삼성재단의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자료조사를 해 보아야겠지만 송당본풀이와 삼성신화의 친연성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성립될 수 있는 흥미로운 정보다.


▲ 덕천 금성당. 문곡성(문국성)을 모시는 당이다. (사진=강순희)


▲ 김송로 길가에 펼쳐진 보리밭(사진=강순희)

웃송당 네거리, 김송로1070에서 하덕천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어쩌면 문곡성을 조심스레 들고 경작지를 찾아 나섰던 이들이 걸었던 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서쪽으로 오름이 밭을 감싸고 북동쪽으로 뻗은 내리막 둔덕에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다. 춘분의 봄바람에 보리가 잘 자라는 걸 보면서 농사꾼들이 하는 생각은 비슷할 거란 생각을 하였다. “잘 자라 내 새끼들~”

저자 강순희
「제주 신화의 숲 - 문화소로 걷다」(2022, 한그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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