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당 금백조와 덕천 문곡성, 신화에 저장된 농경의 전파 경로

[신화의 숲, 문화소로 걷다 ②] 송당의 어원은 산듸

좋은 햇빛에 얼었던 땅이 녹는다. 춘분날(3월 20일)은 몹시 바람이 매웠다. 하지만 바로 따듯해지며, 기온은 금세 봄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춘분날 전후의 하루에 우레가 울리면, 그해는 곡물이 잘 여물 것이다.”


『임원경제지, 위선지』 춘분날 점후에 나오는 대목이다. 나는 매서운 바람에 몰아친 깜짝 추위를 우레쯤으로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다. 농촌에 살아보니, 춘분 전후에 얼마나 농촌이 분주한지 알겠다. 나무 전정도 하고, 비료도 하고, 겨우내 일터였던 창고도 정리하고 일 년 치 농약 준비도 하여야 한다. 매 순간 농사꾼들은 농사가 잘되기를 바랄 것이다. 아마 아주 오래전 농부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지금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원초 경제사회에서 백성들은 어떻게 정보를 주고받으며 지혜롭게 농경을 발전시켰을까. 백성들은 제주 신화에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 송당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본 당오름. 그곳에 제주신화의 고향인 송당본향당이 있다.(사진=장태욱)

‘거멀 문곡성’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거멀은 제주시 구좌읍 덕천리의 옛 이름이다. 덕천리 관련 향토지를 보면 덕천리는 송당리에서 분화된 마을이라 쓰고 있다. 왜냐면 송당 백주할망의 큰아들 문곡성(문국성)을 모시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심방들은 송당계 본풀이를 할 때 한결같이 1남으로 ‘거멀 문곡성’을 든다. 전통적인 관념이라면 큰아들 문곡성에 대한 관심과 조명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째서 큰아들 ‘문곡성’에 대한 얘기가 없을까? 나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금백조와 소천국은 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을 낳았다. 이들이 줄이 벋고 발이 벋어 삼백일흔여덟, 제주 마을마다 당신(堂神)이 되었다. 그래서 송당계 신들이 제주 당신의 원조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아들 18명과 딸 28명이면 금백조와 소천국의 자식이 무려 46명이다. 제우스(Zeus)도 18남 25녀를 두었지만, 제우스의 아내는 21명이나 되며, 이들에 대한 서사도 상세한 편이다. 만약 송당계의 계보를 후대에 전하고자 한 의도였다면 금백조 외의 다른 어머니에 대해서도 전해져야지 않을까?


▲ 송당초등학교 향토관에 전시된 옛 농기구들. 송당은 도내에서도 농사가 발전한 곳이었다.(사진=장태욱)

금백조는 누구 또는 무엇이었을까? 본풀이에 담긴 상징 조각을 맞추며 연결 추론을 한 결과, 금백조가 토종 벼 이름이라는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다다조(多多租), 조동지(趙同知), 석산조(石山租), 모조(毛租), 점조(粘租), 냉조(冷租), 해조(海租), 사래벼, 정금조(正金租), 중조(中租)…….

이는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센터의 종자은행에 보관된 토종 벼 명칭 중 일부다. 금백조의 이름과 유사한 작명법으로 토종 벼 이름이 나열된다. 우리나라 벼 품종 개발변천사를 보면 1910년대는 조동지, 석산조, 노인나, 조도, 다다조, 백조, 대구조 등 재래종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일본의 벼 품종이 도입되기 전이라 오래전 토종 벼 명칭이 계속 유지 전승되었을 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제주는 논이 없어 벼농사에 대한 정보와 기록이 많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다. 그런데 밭에 심어서 수확했던 밭벼를 떠올리면 금백조가 벼의 이름이었을 거란 추론이 이상하지 않다.


▲ 하논분화구에 벼가 익어가는 풍경. 하논을 제외하고 도내에서 재배되는 벼는 대부분 산듸다. 송당은 산듸가 잘 자라는 마을이었다.(사진=장태욱)

『농사직설』 종도조(種稻條)에 따르면 밭벼에 대한 정보가 나온다. 벼를 건식 재배하는 것이며, 향명은 묏벼라 소개하고 있다. 묏벼가 바로 산도(山稻), 제주 말로 산듸다. 산듸는 제주도처럼 밭에 물을 댈 수 없는 지역에서 재배되었다. 보통 산듸는 중산간 목장지대 밭에서 메밀 농사했던 그루에서 재배한다고 한다. 1996년 제주대학의 현지학술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송당은 보리농사보다 메밀이나 산듸가 잘 되는 곳이었다고 한다. 중산간 경작지에서 수확한 하얀 산듸쌀은 제주도 전체에 획기적인 농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게 아닐까?

이 가설은 송당의 어원도 해결해 주었다. 송당은 ᄉᆞᆯ당(쌀당)에서 나왔을 거란 추론이다. 12세기 초 송나라 관리 손목(孫穆)은 고려를 방문하고 나서 『계림유사』에 고려 어휘 350여 개를 소개하였다. 그중 ‘흰쌀은(白米曰) 한보살(漢菩薩)’이라는 대목이 있다. 15세기에 쓰인 쌀의 고어형 ‘ㅄᅟᆞᆯ’을 보면 그 이유가 짐작된다. 어두에 ‘ㅂ’는 ‘보’, ‘ᄉᆞᆯ’은 ‘살’로 표기한 것이다. 경상도 토박이들이 쌀을 ‘살’로 발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송당은 [송당] 또는 [손당]으로 불린다. 단순한 발음 변이로 보아 넘길 수 없다. 아래아( •)표기 때문에 그림으로 나타내 보았다.


▲ 송당의 어원을 추론했다.


먼저, ᄉᆞᆯ당은 솔당으로 발음되고, 그 후 솔이 소나무 송(松)으로 해석되며 송당(松堂)으로 기록되었다. 다음은 솔의 ‘ㄹ’이 ‘ㄴ’으로 발음 변이가 일어났다. 그 결과 ‘손당’이 되었다. 한편 ᄉᆞᆯ이 살로 바뀐 후 ‘ㄹ’이 ‘ㄴ’으로 변하여 ‘산당’이 될 수도 있다. 이는 금백조의 큰아들을 모신 덕천리의 당 이름이 금산당이라는 것과도 연결된다.
<다음호에 계속>

저자 강순희
「제주 신화의 숲 - 문화소로 걷다」(2022, 한그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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