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지 않아도 은은한 향기, 아버지를 떠올리는 꽃

[주말엔 꽃] 겨울을 넘긴 희고 여린 비파꽃

을사년 1월을 역사의 강으로 흘려보냈다. 서귀포에서 2월에 접어들었으니 이제 봄을 맞아야 한다. 이제 살아있는 많은 것들이 제 색깔을 드러낼 준비를 하는 시기다.

며칠 전 아동문학가 강순복 작가가 페이스북에 친정에 비파꽃이 피었다고 자랑했다. 비파꽃은 동백과 비슷한 시기에 꽃을 피우는데, 색깔이 회색에 가까워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강 작가의 친정이 마침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찾아가 꽃을 구경하기로 했다.


▲ 강순복 작가의 친정집 입구에 비파나무가 꽃을 피웠다.(사진=장태욱)

꽃이 피어난 집은 효돈천이 일주도로를 지나는 부근이다. 효돈천 맹살이 서쪽 가까운 곳인데, 비파나무 한 그루가 가지 끝마다 꽃이 뭉텅이로 피웠다. 가까이 다가서니 밤꽃 냄새 비슷한 비파꽃 특유의 향이 짙게 풍긴다. 꽃이 향기를 내뿜는 건 곤충을 유혹하기 위함인데, 아직 외출 나온 벌은 보이지 않았다.

비파는 장미과의 상록수로, 높이 약 5미터까지도 자란다. 잎은 타원형으로 길쭉한데, 길이는 대체로 15~25센티미터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든 제주도와 전라남도, 경상남도 남해안에 주로 자생한다.


▲가지 끝마다 꽃이 뭉텅이로 피었다.(사진=장태욱)

열매가 마치 달걀처럼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중국의 악기인 비파와 닮았다고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 중국의 고사에는 조조가 비파를 무척 좋아해 나무와 열매의 수를 헤아리고 병사에게 보초까지 세웠다고 전한다.

겨울의 초입, 다른 꽃들이 대부분 자취를 감출 때면 비파는 꽃을 피우고 향을 풍긴다. 꽃받침은 황갈색으로 털이 많고, 그 위에 상아색 꽃송이가 꽃잎을 펼쳐진다. 작은 꽃들이 가지 끝에 뭉텅이로 피는데, 이 여린 것들이 뭉쳐서 오롯이 겨울을 견뎌낸다.

열매는 초록색으로 자라다가 초여름이면 노랗게 익는다. 색깔이 짙은 노란색으로 변하면 진한 단맛을 낸다. 직경이 3~7센티미터까지 크는데, 속에 씨를 제외하면 먹을 수 있는 부위가 많지 않다. 그래도 처음 씹었을 때 느끼는 달콤함과 향긋함 때문에 여름 열매로는 인기가 좋다.


▲ 비파꽃(사진=장태욱)
우리 조상들은 비파를 약으로 사용했다. ‘동의보감’에서는 비파 열매가 폐의 병을 고치고 오장을 윤택하게 하며 기를 내린다고 설명했다. 최근 연구에도 비파에 중요한 포함된 칼륨은 혈압을 낮추고 혈관을 튼튼하게 해 심혈관계 질환을 예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비파 열매의 펙틴 성분은 장의 연동 운동을 자극해 소화를 돕고 변비를 방지한다.

비파 잎도 약재로 긴요하게 사용된다. 잎을 볶은 후 꿀이나 생강즙을 더해 달여 마시면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가래를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잎에 들어 있는 유기화합물은 당뇨나 암을 예방하는 성분도 있다.

강 작가가 이 나무를 애틋하게 여기는 건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소 무뚝뚝했는데, 비파 열매가 익으면 딸에게 가져다주려고 제주시까지 먼 길을 다녀가셨다고 한다.

비파는 화려하지 않은 꽃으로, 노랗고 달콤한 열매를 준비한다. 마치 무뚝뚝해도 따스한 사랑을 품었던 아버지를 닮은 나무인가보다. 며칠 후면 아버지 기일이라는데, 대문 앞 비파나무에 꽃이 만개했다. 작가는 비파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잠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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