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에 피어난 노란 꽃, 중국까지 가서 수소문했지만 끝내
[주말엔 꽃] 납매(蠟梅)
한겨울인데 가녀린 가지 끝에 노란 꽃이 피었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듯 꽃은 한 결 같이 땅을 향했다. 꽃의 바깥은 노랗고 안쪽은 빨간 게 보리빵 속에 붉은 팥이 들어 있는 것처럼 대비를 이룬다. 벌집 모양인데 매화를 닮았다고 ‘납매(蠟梅)’라 부른다.
납매는 꽃봉오리의 형태로 초겨울을 지내다가 겨울이 되면 꽃을 펼친다. 차가운 겨울에야 꽃을 피우자니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닐 텐데, 그 고단함 때문에 꽃이 한결 돋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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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매는 꽃잎과 꽃받침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이것들을 합쳐 꽃덮이(花被)라고 부른다. 납매의 꽃덮이는 노란색과 붉은색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바깥쪽 노란 것을 바깥꽃덮이라 부르고 안쪽 붉은 것을 속꽃덥이라 부른다.
납매가 핀 곳은 토평동 김찬수 박사의 서재 마당이다. 김 박사가 국림산립과학원 열대아열대산림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다 은퇴할 즈음에 마련한 서재다. 그는 이곳에서 동서고금의 많은 책을 쌓아놓고 매일 씨름한다. 깊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펼치고 있어 그 끝은 그 끝이 어디까지 미칠 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김 박사는 서재 마당에 동백나무와 수선화를 비롯해 다양한 화초와 수목을 심어 가꾼다. 마당에서 피어난 꽃을 수시로 자랑하는데, 그때마다 여간 부럽은 게 아니다. 현직에서 벗어난 이후 식물을 벗 삼사 연구에 몰입하는 모습, 옛 선비의 풍모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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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가 자랑하는 납매는 지인이 선물한 것이다. 일찍이 조선 선비의 사랑을 받은 꽃인데, 제주도에선 흔하지 않다.
조선시대 강희안(姜希顔, 1417~1465)은 조선의 꽃과 나무의 특성을 정리해「양화소록(養花小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강희안은 납매에 대해 ‘매화의 품종은 아니나 매화와 같은 시기에 피고 향 또한 매화와 비슷한데, 꽃의 모양이 꿀벌의 집과 비슷해 이 같이 이름이 붙었다.’라고 설명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조선의 산천을 자신의 마당으로 가져와 즐겼다, 마당에 산처럼 돌을 쌓고 거기에 나무와 꽃을 심었는데, 이걸 석가산이라고 한다.
조선 초기 이행(1478~1834)이 남긴 『용재집』「삼락정기」에는 ‘담장 아래에 오죽과 노송을 심고 간간이 화초와 괴석, 납매, 일찍 피는 국화를 섞어 놓았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행은 자신 마당에 석가산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국화와 남매를 심었다는 내용이다.
조선중기 선비 김창업(1685~1721)은 서울 외곽 석관동에 별장을 경영했는데, 거기에는 동백과 배롱나무, 수선화, 난초, 해당화, 찔레, 진달래, 국화, 패랭이꽃 등 다양한 식물을 가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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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식물을 너무 사랑하여 중국에 다녀오는 사신에게 부탁해 현지 식물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1712년에는 사신 일행을 따라 직접 중국을 방문했는데, 그가 남긴 연행록에는 화초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군데 등장한다.
그는 중국인의 집을 방문해서 현지의 꽃을 보여주라고 요청해 구경했고, 그 특징을 상세히 기록했다, 또, 그들에게 부탁해 식물의 일부를 조선에 들여오기도 했다.
중국인 마유병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서향화, 협도화, 납매를 보여줄 것을 요청했는데, 마유병은 이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마유병은 자신의 집에 납매가 없지만 화초포(청나라의 온실)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식물을 키우기 위해 온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납매는 온실에서 자라고 있었다. 김창업은 끝내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당시 중국에는 3가지 종류의 납매가 있었다. 김창업이 중국에서 보고자 했던 납매가 조선 초기 이행이 석가산에 심은 것과 같은 종인지, 또 지금 국내에 보급된 것과 같은 종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마도 원예에 정통했고 중국의 화초에 관심이 많았던 김창업은 이미 조선에 있던 납매와 다른 종의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파가 늦게 찾아왔는데, 노란 납매가 한 서재 마당에서 꽃을 피웠다. 작고 가녀린 게 추운 겨울을 견디면서도 은은한 향기까지 풍긴다. 역시 선비의 사랑을 받을 만한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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