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마다 식생 달라지고 초원엔 습지식물, 이게 ‘마른 오름’이라고?

[김미경의 생태문화 탐사, 오름 올라 ⑭] 마른 섬에 물을 품은 오름들(14) 여문영아리

 오름 사이를 흐르는 솔내, 드넓은 초원 위의 습지들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물영아리오름에서 마주하던 오름, 여문영아리. 북쪽을 바라보면 넓은 초지 너머로 그만의 위용을 뽐내며 떡하니 지키고 있다. 분화구 안에 물이 있어 신령스럽기까지 하다는 물영아리와 대비하여 여문영아리는 물이 없는 신령스러운 곳이라고 한다. 한자로 ‘영할 영(靈)’을 써서 신령스럽다라고 이야기들 하는데 과연 한자가 들어오기 전 사람들은 어떻게 썼을까 의문이 든다. 여문영아리는 그래서 더 궁금해지기도 한 오름이다.


▲ 여문영아리오름(사진=김미경)

이렇게 세간에 널리 알려진 오름들이지만 두 오름 사이에 흐르는송천은 유로연장이 19.55킬로미터로 제주도 내에서는 손꼽을 만 하지만 잘 알지 못한다. 이 하천을 경계로 물영아리는 남원읍, 여문영아리는 표선면 지경으로 갈린다.


눈앞에 펼쳐진 대평원, 제주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탄하면서도 널찍한 초원이다. 초원 끝머리에 바람을 막기 위해 심었음 직한 삼나무숲은 이웃하는 공간과는 단절된 듯 하지만 그 너머로 또다시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목초지로 이용되고 있는 이곳, 지금은 촐이 베어져 없어진 덕분에 볼 수 있는 풍광이다. 멀리서도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산체, 여문영아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가운데 골짜기인 듯한 선으로 오름의 동서 봉우리를 구분해 준다.



▲ 여문영아리 입구 습지(사진=김미경)


그곳을 향해 십여 분을 걷다 보면 오름 입구에 제법 큰 습지를 만난다. 둔덕으로 물을 가두어 이용하였다는 이곳은 물이 맑은 걸 보면 아주 조금씩이나마 솟아나는 듯하다.

 동서남북이 훤한 정상, 중산간 태양광전지판은 옥의 티

인위적으로 넓힌 듯한 질퍽한 길을 따라가면 오름 입구에 다다른다. 남사면전체가 곰솔을 조림한 것처럼 보이지만, 올라갈수록 개체수가 많고 배열 상태도 질서 없이 보여 자연림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낙엽수들은 낙엽을 떨어뜨렸다. 덕분에 골짜기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골짜기는 깊지 않은 듯 하지만 오르다 보면 점점 깊어진다. 오름 정상의 표고는 514미터다. 그중 고도 450미터쯤 올라간 골짜기의 끝자락에는 그 깊이를 더할 뿐만 아니라 식물구성원도 초입과는 달라진 모습, 난대성의 상록수들이 차지하고 있다. 골짜기임을 증언하기라도 하는 듯 커다랗게 자란 구실잣밤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다.


▲ 송천에 흐르는 물을 가두어 만든 저수지(사진=김미경)

멀리서 바라보면 짙은 상록수림의 모습, 살짝 경사진 탐방로를 오르다 보면 산수국들도 만나게 된다. 숲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산수국의 꽃을 볼 수 있는 재미도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오르는 발길은 식생의 변화를 관찰하는 재미에 푹 빠져 금새 정상에 다다른다. 정상에 올랐을 때 풍광을 보는 맛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으랴. 분화구가 원형(圓形)이 아닌데도 동서남북의 모습을 훤하게 볼 수 있어 이곳을 오르는 이들에게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중산간에 설치된 태양광전지가 눈에 거슬린다. 상산나무와 쥐똥나무 등 키 작은 낙엽활엽수와 덩굴성식물들이 가시덤불과 함께 어지럽게 정상 면을 차지하고 있어 살짝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목축이 끊긴 오름에 나무들이 들어와 새로운 숲으로

이곳은 긴긴 세월, 목장으로 이용해 왔던 곳이다. 식생이란 자연스럽게 천이 과정을 밟게 마련인데 인위적으로 억눌려 그 변화를 누리지 못했던 곳이다. 지금은 오름에서 가축을 키우는 일이 없으니 나무들이 자라고 기후변화에 따라 빠르게 변화됨을 관찰할 수 있다. 북쪽으로 터진 분화구 안은 제주조릿대 군락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경사가 급한 동사면에는 이미 꽉 들어찼다. 제법 키가 큰 때죽나무, 팥배나무 등 키 큰 낙엽활엽수들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다. 북사면 쪽은 햇빛보다 물을 더 필요로 하는 난대성 식물인 참식나무, 생달나무, 새덕이 같은 녹나무 식구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새덕이가 유난히 많다.


▲ 오름 주변 초지에서 습지식물인 골풀이 자란다.(사진=김미경)

북쪽 사면이 터진 형태를 이루고 있는 분화구의 모습, 오름을 즐겨 오르는 탐방객들은 정상 둘레를 돌기도 하지만, 분화구 안을 가로질렀던 흔적들이 뒤이어 오르는 탐방객들 한테 좋은 길 안내가 되기도 한다. 한겨울인데도 이곳은 꽃망울과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봄인지 겨울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계절은 바뀌고 있나 보다.

 여문영아리 지명은 드넓은 습지에 있는 오름

여문영아리 오름 주변 초원은 온통 젖어 있다. 촐을 베어낸 곳에 넓은 초원에 골풀 같은 습지식물들의 흔적들도 보인다. 군데군데 작은 물웅덩이뿐만 아니라 남원읍과 표선면의 경계선을 이루는 송천지류를 막아 넓은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곳이 물이 풍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여문영아리 정상에서 바라본 주변 풍광이 아름답다.(사진=김미경)

여문영아리는 오름에 물이 없어 ‘마르다’라는 의미로 불려진 이름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국어사전에 여물다라는 말은 ‘곡식알이 들어 딴딴하게 잘 익다’라고 나와 있는데 도대체 이 말이 어떻게 마르다와 연관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제주어사전이나 지명관련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고대어로 여문이란 말은 원래 ‘흠뻑 적시다’, ‘젖다’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물의 깊이가 얕게 흐르는 곳을 말하는 ‘여울’이라고도 한다고. 어쩌면 여문영아리는 물이 없어서 불리는 이름이아니라 물이 흠뻑 젖어 있는 곳을 말하는 건 아닐까.

여문영아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가시리 산145번지일대
표고 514미터 자체높이 134미터


김미경
오름해설사, 숲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다. 오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단법인 오름인제주와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사무국장으로도 열심이다. 한림북카페 책한모금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개인 블로그를 통해 200여 편의 생태문화 관련 글과 사진을 게재해 왔다. 본 기획을 통해 수많은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마당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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