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에 들어 올린 존엄한 꽃, 광장의 청춘처럼 찬란하다

[주말엔 꽃] 정방폭포 주변 산책로에 수선화

소한이다. 본격적으로 추위가 시작되는 절기인데, 서울 경기에 대설특보가 내렸다. 소한이 이름값을 했다. 주말이라, 내란을 일으킨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광장에 모였다. 흰 눈이 내리는 날에도 자리를 지키며 열정을 태우는 시민들이 있다. 폭설이 내리는 광장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청춘의 미소가 너무나 찬란하다.


▲ 산책로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문섬(사진=장태욱)

서귀포 서복전시관에서 정방폭포 인근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 주변에 이르는 산책길이 있다. 서귀포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벼량 위의 산책길에 수선화가 자란다. 지나는 사람에게 향기를 선물하기 위해 누군가가 심은 것 같은데, 1월이면 이 길가에 하얀 꽃이 핀다.

수선화가 피길 기다리다 5일, 이 산책길을 걸었다. 그런데 너무 이른지 수선화 대부분은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 불로초공원 주변의 일부 수선화는 힘겹게 꽃대를 세우는 중이다.


▲ 꽃대를 세우는 수선화(사진=장태욱)

그런데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 남쪽에 수선화 몇 그루가 꽃을 피웠다. 남쪽 섶섬이 내다보이는 벼랑 위에서 하얀 꽃이 청순한 빛깔을 자랑한다. 초록 잎사귀 위로 하얀 꽃을 들어 올린 수선화의 기품, 눈 내리는 광장을 지키는 우리네 청춘처럼 황홀하다. 수선화가 피었으니 이 도시는 겨울은 절정에 들어섰다. 수선화 꽃이 겨울에 도시를 지키며 고귀한 빛깔과 향기를 발할 것이다.

예로부터 수선화는 선비들의 꽃이었다. 특히, 내륙에서는 좀체 보기 힘들었는데 제주도에는 비교적 흔한 꽃이었다. 그래서 선비들은 수선화를 보고 그 고아한 자태를 시로 담고 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수선화를 사랑한 선비로 유명하다. 추사는 24세에 아버지를 따라 연경(베이징)에 갔다가 수선화를 처음 보고 한눈에 반했다. 나이가 들어 43세 때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사신이 아버지에게 선물한 수선화를 보고, 꽃을 고려청자에 심고 다산 정약용에게 선물했다.


▲ 수선화(사진=장태욱)

다산은 추사의 선물에 대해 시로 화답했다. 시의 원제목은 <수선화>이고 부제는 “늦가을에 벗 김정희가 향각에서 수선화 한 그루를 부쳐 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청자였다(秋晚 金友喜香閣 寄水仙花一本 其盆高麗古器也)”로 되어 있다.

추사의 시에는

일찍이 없었던 것 얻었기에 다투어 떠들썩한다/ 어린 손자는 처음으로 억센 부추에 비유하더니/ 어린 여종은 도리어 일찍 싹튼 마늘 싹이라며 놀란다

라는 구절이 있다. 진귀한 것이 선물로 왔기에 집안이 떠들썩했던 모양이다.


▲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 주변에 꽃을 활짝 피운 수선화(사진=장태욱)

추사와 다산이 수선화를 주고받은 지 10년 쯤 후에 추사가 제주에 유배됐다. 그런데 제주 도처에 널려 있는 수선화를 보고 추사는 친구 권돈인에게 편지를 썼다. “산과 들, 밭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대정사람들은 수선화가 농사에 방해가 된다고 잡초로 취급했다. 너무 흔해서 농부들이 소와 말 먹이로 쓰기 일쑤였다. 추사는 대정의 농부들이 수선화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꽃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안쓰럽다”고 한탄했다. 함부로 대해지는 수선화를 보면서 버려진 자신의 처지와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제주도가 겨울에 접어들었다. 이제 하얀 수선화과 제 빛깔을 뽐낼 시간이다. 수선화가 있어 황량한 땅이 아름답다. 저 도시의 황량한 콘크리트 광장이 청춘의 웃음이 있어 아름다운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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