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총의 산지 교래, 가체(ᄃᆞᆯ뤼)가 구실할망을 불렀다
[신화의 숲, 문화소로 걷다 ⑩] 송당의 9남, 도리 산신또를 만나러(2)
3. 교리(橋里)에서 교래촌(橋來村)으로 바뀌어
도리 마을이 교래촌(橋來村)으로 처음 기록된 자료는 1696년 이익태의 시문집 『지영록 知瀛錄』이다. 이 목사는 서귀포 유람을 마치고 조천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래촌에서 하룻밤 유숙하였다고 적어 놓았다. 교래리에 객사(客舍)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02년의 『탐라순력도』 산장구마 화첩에도 교래리 주변에 객사 건물과 12채의 민가가 나온다. 한라산에 국마장이 형성된 이래 250여 년이 지나며 이 마을은 수렵과 점마를 관장하는 중요한 마을로 자리 잡았다. 이 사이에 마을 이름은 교리(橋里)에서 교래촌(橋來村)으로 바뀌었다. ‘래(來)’가 추가된 이유는 무얼까.
처음 고득종이 상소문에서 교리(橋里)라 기록한 것은 ᄃᆞ리송당>ᄃᆞ리>다리에서 교(橋)가 나왔을 것이다. 한편 ‘다리’는 물을 건너게 하는 시설물 외에, 쪽지는 머릿속에 넣는 다른 머리털을 의미하는 다리(髢)도 있다. 지금 우리가 가체(加髢)라고 부르는 말이다. 그걸 당시 백성들은 ‘ᄃᆞᆯ뤼’라 불렀다. ‘ᄃᆞ리’와 발음이 비슷하지만 리을(ㄹ) 음이 추가되었다. 이에 ‘래(來)’를 음차하여 추가한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까닭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이 마을은 중요한 산둔목장으로서 사냥과 점마 후 부산물이 생겼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말총’이다. 제주대학교박물관 기획전 <ᄌᆞᆯ앙ᄌᆞᆯ앙 모자 ᄌᆞᆯ아사>에 가보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말테우리들은 말들이 털갈이를 끝내고 영양 상태가 가장 좋은 음력 3, 4월에 말꼬리의 털을 낫으로 잘라 판매하였다.
이렇게 수확한 말총으로 다양한 물건을 만들었다. 제주 민요 <큰아기타령>은 조천읍에 번성했던 수공업을 말해준다.
조천 부근 큰아기덜은 망근 짜레 다 나간다
신촌 부근 큰아기덜은 양태 짜레 다 나간다
화북 부근 큰아기덜은 탕근 짜레 다 나간다
도두 부근 큰아기덜은 모ᄌᆞ 틀레 다 나간다.
-제주 민요 <큰아기타령 중에서>
한마디로 제주는 관모의 최대 생산지였다. 갓의 재료인 말총과 양죽(凉竹)이 제주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갓은 양반들 모자였다. 백성들은 갓일에 쓰이는 말총보다는 낮은 품질로 총비, 총베, 그리고 ᄃᆞᆯ뤼(가체)를 만들어 썼을 것이다.
4. 다리, 가체(加髢) 만드는 마을
교래리를 ‘ᄃᆞᆯ뤼’로 생각한 두 번째 이유는 <도리본향당 본풀이>에 ‘구실할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구실할망은 구실아치(지방 관아의 향리)를 이르는 말이다.
현재 <도리본향당>에는 제를 지낼 때 메 3기를 올린다. 하나는 송당의 아홉째 아들 산신또, 하나는 서당국서 고씨할망, 하나는 구실할망을 위함이다. 서당국서 고씨할망이후 산신또가 하로하로산에서 산설 물설을 밟으며 내려와 좌정했다. 그 후 구실할망의 내력이 본풀이에 추가되었다.
구실둥이 작저구리/ 구실둥이 작치매에/ 둘러입고/ 소리좋다 살장귀를 둘러받아/ 얼씨구나 좋다 절씨구나 좋다
-<ᄃᆞ릿당본풀이> 중에서
본풀이는 구실할망의 치마저고리를 갖추어 입고 살장귀를 치며 얼씨구절씨구 노래한다고 말한다. 앞에는 무슨 일을 완료한 듯한 서사가 담겨있다. 물론 나는 ‘ᄃᆞᆯ뤼’ 만들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은수까락, 놋갱, 흰죽 등은 일상용품이 아니며, 무언가를 만드는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실할망은 객사의 관리를 맡았음은 물론 이 마을 백성들과 함께 경제활동을 하였던 것은 아닐까.
늘 교래리를 지나며 조용하게 서 있는 갓전시관이 궁금했다. 갓전시관을 세운 양태장 장순자 명인의 고향은 조천. 당연히 조천에 갓일 박물관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우여곡절을 끝에 이곳에 세우게 되었노라 하였다. 우연과 필연이 얽힌 갓전시관이 우리가 잃어가는 중요한 이름 한 대목을 일깨워준다고 느껴졌다.
교래리 마을복지회관 마당 안에 있는 <도리본향당>. 노인회장 김복선(1948년생, 여)님에 따르면 원래는 교래사거리 동쪽 약 80m, 남조로 도로변에 있었다고 한다. 마을이 개발되고 환경이 변하면서 마을복지회관 마당 안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일뤳당 고씨할망도 옮겨 모시어 3신위가 되었다. 평소에는 문을 잠가두었다가 정월 들면 부인회에서 청소하고 마을제 준비를 하였다. 깨끗하게 관리되는 당 안에는 정월에 올린 물색이 아직도 정갈하게 걸려 있었다.
상강 무렵, 교래에 있는 오름 아래 평지에는 메밀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을이 빨리 찾아오는 중산간. 척박한 땅을 뚫고 나온 메밀꽃이 소중해 보였다. ᄃᆞ리송당 큰아기들은 피농사를 거두느라 메밀이 꽃 피운 것도 보지 못했을까 슬그머니 걱정이 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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