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래리, 존재에 맞는 이름을 찾아줘야

[신화의 숲, 문화소로 걷다 ⑨]송당의 9남, 도리 산신또를 만나러

1. 교래리, 너의 이름은?


돌에 새겨진 이름표를 찾아 한참을 빙빙 돌았다. 마침 노인회관에서 나오는 어르신(1938년생, 여)을 만났다. 5·16도로에서 교래리로 내려오다 절물 갈림길 바로 아래 마을 표석이 있다고 하였다. 어르신은 1971년 인천에서 교래리로 이주하였다. 제동목장으로 남편이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동목장은 1972년 3월에 문을 열었다. 그 후 교래리 주민으로 60년 가까이 산다고 하였다. 어르신은 마을 표석이 ‘도리 마을’이라고 기억하였다.


▲ 사진 1. 교래 삼다수마을을 알리는 표지판. 이 표지판에서 '교래'라는 이름은 매우 작아졌다.(사진=강순희)

▲ 사진 2. 남조로에서 교래리로 들어오는 입구에 돌에 새긴 이름표는 없었고, 도로표지판만이 교래리를 알려줬다.(사진=강순희)

▲ 사진 3. 2009년에 세워진 '교래 토종닭 유통특구 마을'을 알리는 표석(사진=강순희)

그곳에 가보니, 마을 표석은 ‘교래, 삼다수 마을’이라 새겨 있었다. 교래는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교래리 알동네(교래분교 사거리 일대)를 기준 삼아 동서남북으로 마을 표석을 찾아보았다.

서쪽은 ‘돌문화공원’, ‘교래리자연휴양림’과 같은 큰 이름에 가려 ‘교래리’ 만의 마을 표석은 하나도 없었다. <사진2>와 같이 교통 표지판에 ‘교래’가 들어있어 길 안내를 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동쪽으로는 비자림로가 녹산로와 맞닿을 즈음에 <사진1>과 같은 표석이 있었고, 서귀포시와 제주시 경계 지점에도 역시 <사진1>과 같은 표석이 있었다.


1998년 문을 연 ‘제주 삼다수’가 교래리의 대표 브랜드가 된 점은 이해한다. 그래서 ‘삼다수 마을’이라 부르기로 했다면 <사진3>은 무언가. ‘교래, 토종닭유통특구마을’이라 새겨져 있다. 2009년 8월 제주도는 먹거리 관광명소 육성을 위해 교래리를 1호 특구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교래리 입구에는 ‘토종닭 유통특구, 교래 삼다수마을’이란 대형 입간판이 세워졌다.


송당의 아홉 번째 아들을 찾아 나선 길, 웬 이름 타령? 인가 싶겠다. 이름이 선명하지 못하다는 건 그만큼 약한 존재라는 게 아닐까? 누구나 마음대로, 아무 때나 이름을 바꾸어 부르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면 말이다.

2. ᄃᆞ리송당에서 ᄃᆞ리만 남아


백성들은 이곳을 ‘ᄃᆞ리’라 불렀다. 마을 지명도 알ᄃᆞ리, 샛ᄃᆞ리, 웃ᄃᆞ리라 하였다. ‘ᄃᆞ리’는 1434년(세종16년)에 고득종이 올린 상소문에 교리(橋里)란 지명으로 처음 문헌에 나타난다. 1430년 무렵 한라산 주변 중산간 지대에는 조선의 국마장, 십소장이 만들어졌고 이 일대에도 2소장이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5년 후 ᄃᆞ리 마을에 사람들이 소규모로 정착하며 마을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참고: 『함께 만드는 마을지 교래리, 2019』)

백성들은 왜 이 마을을 ‘ᄃᆞ리’라 불렀을까. 흔히 용암석교인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 그리 불렀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다르다.

“ᄃᆞ리송당 큰애기덜은 피방애질로 다나간다.”는 민요 구절이 있다. ᄃᆞ리송당이 마치 하나의 지명처럼 쓰인다. 송당은 탐라의 세력가 고씨 가문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마을임을 앞의 글에서 줄곧 밝혀왔다. ‘ᄃᆞ리’라는 말은 고어로 ‘산속, 높은 곳’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면 ‘ᄃᆞ리송당’은 ‘높은 곳에 있는 송당’이라는 말이 된다. 즉, 이 일대는 송당 세력가의 중산간 경작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 송당이란 말이 생략되고 ‘ᄃᆞ리’만 남은 것이다. ‘ᄃᆞ리송당’에서는 경작지를 개간하여 잡곡류 재배가 시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본풀이가 말해주고 있다.

굴묵낭목 서안상 받아오던/ 서당국서 큰부인 고씨 할마님/ 방이오름 서안상 불러오던/ 큰도안전/ 좌정ᄒᆞ여시니 ---'ᄃᆞ릿당본풀이' 중에서

이 본풀이의 주인공은 고씨 할마님이다. 그는 서당국 큰부인이다. 서당국은 서당에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때 서당은 글공부하는 곳이 아니다. 서당은 서당(黍堂)으로 기장·조·피와 같은 곡식의 씨앗을 관장하는 곳이다. 송당(쌀당)보다는 한 단계 낮은 신당이라 해석된다. 고씨 할마님이라 한 이유는 송당과의 연관성을 의미한다고 본다. 1430년 이전부터 이들은 방이오름 일대에서 서속(黍粟, 기장과 조)을 재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득종은 1434년 올린 이 상소문에서 자신의 어미가 교리의 산전에 힘입어 살아왔다고 말하고 있다.


▲ 교래리 일뤠당 굴묵낭목 옥당부인(사진=강순희)


▲ 서당국서 고씨할망의 내력을 설명해놓은 표지판(사진=강순희)

‘서당국고씨할망’을 모신 ‘ᄃᆞ리일뤠당’은 2001년 개발된 ‘제주미니랜드’ 안에 포함되며 사유지가 되고 말았다. 차츰 마을 사람들은 당에 드나들기 불편했다. 그래서 2010년 마을회관 옆 본향당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답사 길에 예전 일뤠당을 찾아가 보니, 그곳이 오래전 신당이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께 무언가를 비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다양한 자원을 가진 교래리가 자기 이름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름은 그때와 지금을 연결해 주는 강한 끈이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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