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미공예의 마을, 불 담당하는 도깨비가 앗뜨채비?

[서귀포시 미래문화자산] ⑦ 솥 굽는 마을 덕수리

산방산이 어디든 보이는 마을이다. 남쪽으로 산방산이 버텨주니 든든하기만 하다. 소개할 곳은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덕수마을이다. 원래는 덕수라는 이름이 아니었다. 옛 이름은 자단리다. <탐라순력도>에 들어 있는 지도 ‘한라장촉’을 보면 ‘자단리’라는 이름이 뚜렷하다. 고지도의 상당수는 ‘자단리’ 혹은 ‘자단촌’이라고 덕수마을을 표기하고 있다.


▲ 덕수마을에서 바라본 산방산

덕수리는 자단리라는 이름만 가진 건 아니었다. ‘쇄당’ 혹은 ‘새당’으로도 불렸다. 당을 없애서 쇄당인지는 알 수 없으나, 19세기 중반에 제작된 <탐라지초본>을 보면 ‘신당원(新堂園)’이라는 과원을 표기도 있다. ‘신당’이라는 글자를 통해 ‘새당’과의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다 19세기 후반부터 ‘덕수’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고, 지금까지 줄곧 쓰인다.

▲ 솥과 불미마당

인간이 그릇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신석기시대부터이다. 당시엔 흙이 재료였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철을 쓰게 된다. 덕수마을은 철과의 인연을 지녔다. 철만 있어 그릇이 나오지 않는다. 틀을 제대로 잘 만들 흙도 필요하다. 덕수마을을 그런 게 잘 갖춰졌다. 하나의 솥이 나오려면 용광로인 ‘둑’을 다스려야 하고, 그릇의 기본틀이 될 ‘뎅이’도 잘 만들어야 한다. 여기엔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 원대장, 알대장, 젯대장, 둑대장, 질먹대장, 불미부는 사람 등의 협조로 솥이 탄생한다. 솥 등을 만드는 공간을 불미마당으로 불리는데, 덕수마을은 일찍이 풀무질이 성행했다.


▲ 덕수리 섯동네에 있는 불미마당

옛이야기를 보면 불은 도깨비(제주에서는 ‘도채비’라고 한다)와 관련이 있다. 제주도는 마을별로 본풀이를 지니는데, 덕수마을엔 ‘새당본풀이’가 전해온다. 본풀이는 마을의 생업과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새당본풀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새당은 뒷할으방 악근청탁 한청탁 갈매하르방 갈매할망 (중략) 선앙도령 아미도령 야채 참봉 새당 송재박이 불미대장칩으로 들어간 귀신이우다.”


덕수마을에 있었다는 새당의 본향당신은 ‘뒷할으방’으로 불리기도, ‘갈매하르방 갈매할망’으로 불리기도, ‘참봉’ 혹은 ‘불미대장칩으로 들어간 귀신’ 등으로 불렸다. 이들 신은 한결같이 솥을 만드는 대장장이신이다. 새당의 도채비신은 생업의 수호신으로, 불미대장의 집에서 모신 신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현재는 대장장이와 관련된 새당, 즉 도채비당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아쉽다. 그렇다고 너무 서글퍼할 일은 아니다. 덕수리의 불미마당의 벽화를 주목해보자. 뜨거운 쇳물과 불을 담당하는 도채비인 ‘앗뜨채비’, 용광로에 광석을 담당하는 키가 큰 도채비인 ‘꺽채비’, 불미공예 거푸집을 담당하는 삼형제 도채비인 ‘거푸도채비 삼형제’, 불미공예의 최종단계로 완성된 무쇠 주물을 보며 기뻐하고 있는 도채비인 ‘깨채비’를 그려 보여준다. 벽화는 만들어낸 이미지이지만 솥을 만드는 덕수마을의 느낌을 잘 전달한다.


▲ 곶바구리

▲ 사라진 물통과 공동수도의 흔적

사람이 사는 조건 중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게 있다. 바로 물이다. 제주도는 여느 바닷가에 가더라도 용천수를 만나게 된다. 바닷가와 달리 중산간은 물이 귀한 마을도 많다. 덕수마을도 물이 귀했다. 물이 있어야 삶이 시작되는데, 덕수마을의 시작을 알린 곳은 ‘곶바구리’다. 여기에 사람이 정착하며 덕수리에도 하나둘 사람이 들어왔다. ‘곶바구리’는 물통의 모양이 ‘꽃바구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곶바구리’는 현재는 마을 중심부와는 떨어진 곳임에도, 여전히 물이 고여 있다.


덕수마을 사람들은 공동수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빗물이 고이는 곳을 찾아 물통을 만들었다. 땅을 파내고, 참흙을 깔아서 물이 새지 않게 다졌다. 그같은 물통은 10개를 넘었다고 한다. 동동네와 서동네에 그런 물통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공동수도가 들어오면서 물통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개발의 여파도 물통을 없앤 하나의 원인이다.


▲ 한쪽 벽만 남은 물탱크

덕수마을에 공동수도가 들어오기 시작한 건 1972년부터이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지하수로 퍼올린 물을 저장할 공간이 필요했다. 마을사람들은 예전에 서로 의지하며 물통을 만들었듯이, 물탱크를 함께 만들어갔다. 기초는 돌로 다지고, 주변은 시멘트를 발랐다. 아쉽게도 힘들여 만들어둔 물탱크는 모두 사라졌다. 다만 올렛담을 구성하고 있는 물탱크의 한 벽면은 남아 있다. 도로명 ‘덕수회관로’를 주목해보자. 덕수마을의 종대거리 동쪽으로 ‘제5호 물탱크 1972년 4월 2일 준공’이라는 글자를 새긴 벽면을 찾는 재미가 있다.


▲ 종대거리

▲ 사라진 종, 이름만 남은 거리

덕수마을의 동동네가 큰 마을이었을 때, 중요한 일을 알린 역할을 한 게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탑을 세워서 종각을 만들고, 일이 생기면 종을 두드렸다. 나중에는 사이렌을 달기도 했다. 새마을사업으로 도로가 넓혀지며 종각은 사라지고, 지금은 종을 치는 모습의 그림을 담아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종대거리는 예전엔 관찰의 대상이기도 했다. 마을의 중심이었기에 누가 지나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소문이 났다. 때문에 ‘잽힌막거리’로 불리기도 했다.


▲ 마을회관 구석에 뜸돌이 있다.

▲ 힘자랑하던 뜸돌

뜸돌은 듬돌이나 등돌로 부르곤 한다. 마을마다 장사들은 있기 마련인데, 뜸돌을 들어올리며 힘을 자랑한다. 뜸돌들기는 청년들의 힘겨루기 놀이인데, 이웃마을의 청년들이 지나가다가 뜸돌로 겨루곤 했다. 덕수마을에도 뜸돌이 존재했다. 뜸돌은 작은돌, 중돌, 큰돌 등으로 나뉜다. 덕수마을에 뜸돌거리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길이 넓혀지며 사라졌다. 다만 뜸돌로 쓰이던 중돌이 마을회관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누군가의 힘자랑을 기다리고 있는지, 둥근 돌은 말없이 구석을 지키고 있다.

▲ 남은 이야기

다 소개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다. 덕수마을은 도채비 이야기가 있는 마을로, 귀신과 인연을 둔 장소도 몇몇 있다. 허한 곳을 막아주는 덕수리 방사탑의 거욱대는 남근석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제주4·3 때 성담을 쌓으면서 마을의 돌담과 방사탑을 허물었는데, 마을의 남성들이 일찍 죽었다고 한다. 방사탑을 2004년 복원하고 나서, 남성 어르신 중 오래 사는 분들이 늘어났다고 전한다.



▲ 왼쪽이 구름퐁낭


신비스러운 팽나무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다. 그 나무의 동쪽 가지에서 싹이 먼저 나면 동쪽에 풍년이 들고, 남쪽으로 나면 남쪽에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 나무는 없지만 ‘구름폭낭’이 신비스러운 팽나무의 위용을 대신한다.


그나저나 설문대할망은 솥덕을 걸어 밥을 해 먹었다는데, 그 솥은 어디에서 났을까. 오백장군 역시 자신들의 어머니가 솥에 빠져 희생을 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데, 그 솥은 어느 마을의 작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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