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평화와 되살아나는 폭력, 야만의 시대를 묻는다

[북 리뷰]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문예출판사)

20세기는 파괴의 시대이자 폭력의 시대였다. 제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황폐화됐다.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에 스페인내전이 일어나 전세계 공화주의에 위기를 안겨줬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 일어나 한반도와 인도차이나반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형성된 냉전질서가 세계를 지배했다.

그런데 1991년 소련이 해체됐다. 냉전의 시대는 끝이 났고, 인류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듯 했다. 그런데 강대국간 전쟁은 끝났지만, 강대국과 약소국 혹은 양소국 내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두 차례나 체첸을 침공했고,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그것도 모자라 2022년에 다시 한 번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두 나라간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수차례의 평화협상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전쟁이 발생한 이래 중동 전역에 긴장이 고조된다.


▲ 책의 표지
지난 세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류는 간절하게 평화를 염원했지만 그런 새로운 시대는 오지 않았다. 평화의 기간은 짧았고, 인류의 마음 속에서 전쟁을 향한 욕망은 늘 꿈틀거린다.

『파리대왕(The Lord of the Flies)』은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야만적 본성을 묘사한 작품이다. 윌리엄 골딩(William Gerald Golding 1911~1993)의 첫 작품인데, 전쟁과 핵무기의 공포 속에서 인류가 평화를 오래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드러냈다.

작품은 미래 어느 시대에 영국의 소년들이 원자탄 공격을 피해 태평양 어느 열대 무인도에 안착하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년들은 그곳에서 처음에는 자신들끼리 대표를 뽑고 민주적 방식으로 사회를 유지한다.

소년들은 회의를 소집할 때 소라껍질을 불고, 발언을 할 때에는 소라껍질을 손에 쥐어야 한다. 소년들을 랠프(Ralph)를 대장으로 선출했다. 랠프는 이성과 상식을 상징하는 소년으로 동료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랠프는 잭(Jack)의 희망을 존중해 사냥부대를 이끌고 음식을 구해오도록 했고, 산 정상에 봉화를 지켜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 소년들은 돋보기를 대신해 피기(Piggy)의 안경알로 빛을 모아 불쏘시개에 불을 지폈다. 불은 지나는 선박에 의해 구조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리는 수단으로, 구원의 한 줄기 희망이다.

잭은 대원들을 이끌고 사냥을 즐겼다. 잭은 멧돼지를 잡아와서 과일을 먹던 아이들에게 고기라는 새로운 맛을 제공했다. 그런 가운데 잭과 아이들이 봉화를 살피지 않아 불이 꺼졌다. 랠프는 잭을 질책했고, 결국 랠프와 잭의 갈등이 점화됐다.

잭은 랠프의 통솔을 거부하며 오두막을 떠났다. 잭이 이끄는 사냥부대는 이후로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토인을 흉내 내는 춤을 췄다. 잭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바위에 묶거나 매질을 가하는 방식으로 집단을 다스렸다.

시간이 지나자 고기를 구할 줄 모르는 랠프의 무능력을 지적하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아이들은 하나 둘 잭의 부대를 향해 떠난다. 합리적 민주주의가 비합리적 권의주의에 의해 파괴되는 현대 정치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랠프의 편에는 피기, 쌍둥이 형제 샘과 에릭만이 남았다. 그렇게 남은 4명이 민주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데, 10명 남짓한 잭의 무리가 밤에 랠프 진영을 공격했다. 이들은 난장판을 만든 후 피기의 안경알을 훔쳐갔다. 안경알은 불을 지피는 도구이고, 봉화는 아이들을 구원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랠프의 아이들은 민주적인 질서를 회복하고 피기의 안경알을 되찾기 위해 잭의 무리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거기에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랠프는 커다란 바위가 구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그것을 본 것은 좀 뒤의 일이다. 발바닥에 전해져오는 땅의 움직임 소리를 그는 느꼈다. 벼랑 꼭대기에서 돌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엄청난 붉은 바위가 길목을 질러서 튀었다. 그는 납작하게 엎드렸다. 야만인들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바위는 터에서 무릎을 스치면서 피기를 쳤다. 소라는 산산조각이 나서 흔적을 찾지 못하게 됐다. 무슨 말을 하기는커녕 신음소리를 낼 틈도 없이 피기는 바위와 함께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다.’ - 276쪽

잭의 대원들이 낭떠러지 위에서 바위를 굴려 피기를 살해하는 장면이다. 랠프 일행은 공동체를 구원하기 위해 안경을 찾으려 했지만, 바위라는 가공할 살상 무기의 공격을 받고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야만적 폭력 앞에 문명의 상징인 안경과 민주주의의 상징인 소라는 처참하게 파괴됐다.

평화와 민주적 가치를 지키려는 세계 지성의 외침은 여전히 곳곳에서 폭력에 패배하고 있다. 기대했던 평화의 세기는 오지 않았고, 혐오와 증오를 부치기는 자들이 현실에서 승리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성의 통제를 상실하고 폭력의 광기가 지배하는 세상, 골딩이 경계했던 세상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광기의 세상을 넘어서기 위한 힘겨운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위기에 빠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윌리엄 골딩과 주인공 랠피가 현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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