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난과 제주, 750년 시공을 초월해 피어난 꽃

‘동파와 추사의 만남’ 전시회, 10일부터 14일까지 열려

중국과 제주도 서예가들이 서동파와 추사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소동파의 유배지 중국의 하이난섬과 추사의 유배지 제주도가 두 거장을 통해 학문과 예술이 꽃피는 공간이었음에 착안했다.

한중수묵단청교류협회(회장 상백)과 북경 상예서원(尚艺书院)은 10일부터 14일까지 서귀포예술의 전당 전시실에서 ‘동파와 추사의 만남’ 전시회를 열었다. 유배가 예술로 꽃핀 제주도와 중국의 하이난이 추사와 동파를 매개로 교류를 활성화하겠다는 게 전시의 취지다.


▲ ‘동파와 추사의 만남’ 전시회가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열렸다.(사진=장태욱)


제주 작가의 작품 11점과 중국 작가의 작품 50점이 전시실에 걸렸다. 중국 작가의 작품은 모두 전시를 위해 모두 중국에서 보내온 것이다.

소동파(1037~1101)는 중국 북송 때의 최고 시인이다. 당시 실권자인 왕안석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43세에 황주에 유배됐다. 황주에서 동쪽 언덕 초가에 살면서 밭을 일궜는데, 이때 동파거사(东坡居士, 동쪽 언덕에 은거하는 선비)라는 호를 얻었다. 멀리서 온 친구와 뱃놀이를 즐기며 산문을 남겼는데, 인생 역작이자 유배예술의 백미로 꼽히는 적벽부(赤壁赋)다.

환갑에 이르러서는 하이난에 유배됐다. 하이난은 지금 중국 관광의 성지지만, 당시는 제대로 된 집도 없었고, 여름에 마실 물도 구할 수 없었다. 과거 제주도와 비슷한 환경인데, 동파는 거기서도 동파서원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의 선비이자 화가였다. 1809년 부친 김노경의 연행(燕行)에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수행했다. 이때 연경에서 청나라 최고 문인이었던 옹방강(翁方綱)을 위시한 명사들과 인연을 맺고 학문적 감화를 받았다.

당시 옹방강과 그의 친구들은 소동파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언송도(偃松圖) 그리기를 즐겼다. 언송도는 소동파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아들에게 그려줬다는 그림인데, 그림은 사라지고 조각난 52자 찬문만 남았다. 옹방강 일행은 찬문을 읽으며 사라진 언송도를 재현하려 했고, 추사는 옹방강의 서재에서 그가 그린 언송도를 봤다.


▲ 전시를 기획한 상백 회장이 전시의 취지를 설명했다.(사진=장태욱)

추사는 연행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도 편지로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했다. 옹방강이 1818년 사망할 때까지 추사는 9년 동안 편지를 통해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1840년 동지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돼,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됐다. 추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절망을 딛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추사체를 완성했다.

당시 추사의 제자 이상적이 중국에서 많은 책을 구한 후 몸소 제주도까지 방문해 학문에 주린 추사의 허기를 채웠다. 추사는 그 고마움을 갚을 길을 찾다가, 예전에 옹방강이 그렸던 언송도를 떠올렸다. 붓으로 송백의 기움을 담은 그림을 그렸으니, 역작 세한도(歲寒圖)다.

조선과 청나라라는 공간과 750여 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당파와 추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맥이 통한다. 불의한 시대상황에서 억울하게 원악도에 유배를 당한 것도 그렇고, 절망적 상황에서도 학문과 예술을 한껏 끌어올린 것도 그렇다. 그리고 추사가 유배지에서 절망의 시간 동안 소동파를 그리워한 건 우연이 아니다.


▲ 중석 강경훈이 추사의 고시를 옮겨 쓴 작품이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니 서예 작품 한 점이 눈길을 끈다. ‘상견동파구거사(想見東坡舊居士, 동파선생을 보고 싶어서)’ 이다. 추사가 동파를 떠올리며 쓴 글인데, 중국의 작가가 옮겨 썼다.

전시에 제주 출신 현병찬(한곬)·김구해(삼농)·양상철(한천)·강경훈(중석) 작가와연서우구(燕守谷),동웨이(董玮),스졔홍(师界弘),왕펑페이(王鹏飞),장검(张剑)을 비롯해 30여명의 중국 서화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