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1월 17일 밤, 서귀포의 슬픈 이름을 부른다
[기억의 재구성, 남영호 참사 ⑧] 남영호 희생자 제사
남영호 침몰사고가 발생한지 54년이 지났다. 54년 전, 300명이 넘은 무고한 생명은 차가운 12월의 바닷속에서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남영호 실종자의 가족들은 해마다 음력 11월 17일이면, 상을 차리고 그 억울한 죽음을 위로한다.
서귀포시 동홍동에 거주하는 홍태생 씨는 남영호 참사에서 형을 잃을 잃었다. 형은 故 홍병생 씨인데, 남영호에서 기관원으로 근무하다 사고를 당했다. 故 홍병생 씨는 전분공장과 정미소에서 엔진을 다루는 일을 했는데, 6촌 형님 소개로 남영호를 운행하던 남영상선주식회사에 취업했다. 회사가 부산 영도에 소재한 조선소 경남조선공업주식회사에서 남영호를 건조할 때부터 기관원 직위로 승선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0년 12월 15일(음력 11월 17일), 사고가 났다. 남영호는 부산으로 향하던 중 침몰했고 승객과 선원 등 300명 넘는 탑승자는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홍병생 씨도 대부분 탑승자처럼 물속에 잠겨 시신도 건지지 못했다.
홍태생 씨는 “형님이 우리집 장남이었다. 집안이 제주4·3으로 아버지를 잃고 매우 가난했다. 그른데 형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도 나도 충격이 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형님은 1남 2녀를 두고 있었는데, 형님이 돌아가시자 형수님을 두 딸을 데리고 재가했다.”라고 말했다.
홍병생 씨가 남긴 자녀 가운데 아들은 할머니와 살았고, 두 딸은 재가하는 어머니를 따라 갔다. 그런데 아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 25년 전 쯤에 세상을 떠났다. 두 딸은 어머니를 따라갔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다.
홍태생 씨는 형님이 돌아가시자 남영호희생자유족회 활동을 하며 형님의 시신이라도 찾을까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형님의 시신도 찾을 수 없었고, 책임자 처벌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가슴에 한으로 남는다.
홍태생 씨는 “형님이 돌아가시신 후 내가 집안의 장남이 됐다”라며 “내가 지금까지 해마다 남영호 위령제에 참석했다. 형님 제사도 내가 모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집간 조카가 제삿날이면 우리집으로 온다. 제사는 조카가 오면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17일에 서귀포시 동홍동 홍태생 씨 집에서 故 홍병생 씨의 제사가 봉행됐다. 현태생 씨의 두 아들 내외가 상을 차리고 제를 준비했다. 제주(祭主)의 자녀 중에는 장녀 홍행자 씨가 찾아왔다.
홍행자 씨는 “내가 8살 무렵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얼굴이 뚜렷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나를 목말에 태워주던 게 기억이 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남영호가 남원리 바닷가를 지날 때면 고동을 울렸다. 아버지가 탄 배가 앞을 지나가는 걸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 재가했다. 나와 동생은 딸이라 어머니를 따라갔는데, 너무 가난해서 숨만 겨우 쉴 정도로 살았다. 형편이 어려워서 남원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15살부터 한복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30년 동안 그 일을 했다.”
홍행자 씨는 “동생도 15살에 부산으로 가서 공장에서 일했다. 거기서 살다가 제주도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 위해 제주도로 왔다.”라며 “우리 자매가 고생한 건 말로 다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홍행자 씨 자매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오빠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버려서 숙부와 사촌들이 사는 집이 사실상 친정이 되었다. 본인의 아버지 세사를 차려주는 숙부와 사촌동생들이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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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욱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