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뾰족한 바위가 하멜의 상선을 산산조각 냈나?

[아카이브]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기억과 기록을 잇다’(2)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관장 박찬식) 광장에는 제주도 현무암바위가 여러 기 전시됐습니다. 바위의 크기가 거대하기도 하고 모양도 뾰족한 것이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의 기를 압도할 만한 것들입니다.

이 바위가 여기로 오게 된 경위도 흥미롭습니다. 4대 김인탁 관장의 증언이 영상으로 전시됐습니다.

김인탁 관장은 박물관 광장에 전시된 바위들은 원래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해안에 있던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걸 광장에 전시하려니 당시 제주도와 남제주군의 허가를 받고 마을 이장의 허가까지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광장에 전시된 현무암 바위들(사진=장태욱)

특히 바다에 대한 소유의식이 있고 애정이 깊었던 마을 주민의 동의를 구하는 게 어려웠을 겁니다. 겨우 허가를 받고 굴착기를 빌려서 밤에야 옮겼다고 합니다. 아마도 많은 주민이 알게 되면 곤란해질까 봐 밤에 옮기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대정읍 신도리 해안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있습니다. 1653년 8월 16일 하멜 일행을 태운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워르 호가 풍랑을 만나 표착한 장소가 바로 신도리 해안입니다.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8월 12일부터 바다가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강한 비바람에 선장은 배를 조선하는 것을 포기하고 맙니다. 오히려 바람을 피하기 위해 돛을 풀어버림으로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깁니다. 그러던 중 8월 15일 배가 바위에 부딪치더니, 세 차례 충돌한 끝에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하멜의 기록에는 그 배가 제주도의 어느 지점에 표착했는지는 정확히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오래도록 학계에서는 표착지점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997년에 제주문화원이 야계(冶溪) 이익태(李益泰)의 저서 지영록(知瀛錄)을 그의 후손들로부터 제공받자, 하멜의 표착지에 대한 의문은 풀렸습니다.


▲ 바위가 크고 날카로워 보는 이의 기를 압도합니다.(사진=장태욱)

이익태는 하멜이 제주로 표착한 지 41년이 되는 숙종 20년(1694)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인물. 그는 자신보다 30여년 년 전에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괴와 한 집안 사람이었는데, 이괴에게서 하멜의 표착 사건에 전해 듣고 흥미를 느껴서 <지영록>에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하멜이 표착할 당시 제주목사는 이원진이었는데, 이괴는 이원진의 후임 목사였습니다.

이익태는 <지영록>에 하멜 관련 사건에 대해 '서양국표인기(西洋國漂人記)'라는 소제목을 붙인 후, '계사(癸巳, 1653) 7월 24일에 서양국만인 헨드리크 얌센 등 64명이 함께 탄 배가 대정현 지방 차귀진 밑의 대야수(大也水) 연변에 부서졌다.'고 기록했습니다.

차귀진 밑의 대야수란 한경면 고산리와 대정읍 신도2리 사이의 해변을 지칭했던 지명으로 확인되었다. 18세기 중반 제주도의 지리를 담은 제주삼현도(해동지도)에는 대야수의 위치가 고산과 서림촌 사이 지금의 신도리 해안에 나타납니다.


▲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제주삼현도(해동지도)에 나타난 대야수포

그러면 하멜 일행이 탔던 배를 산산조각 냈던 그 바위가 혹시 지금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광장에 전시된 그 바위는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품게 되니 바위가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광장에 전시된 바위를 일일이 확인하는데, 현무암 네임태그에는 대정읍에서 온 것들이 무릉리나 일과리에서 가져온 것으로 기록됐습니다. 김인탁 4대 관장의 증언과는 약간 다른 기록입니다.

박물관 담당자에게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담당자는 기억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오래 전 일이어서 김인탁 전 관장의 기억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어째든 무릉리는 신도리 인근 해안입니다. 이런 바위가 깔린 해안이어서, 풍랑에 휩쓸리면 부딪쳐 부서지기 일쑤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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