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과 막걸리 한 사발의 평화, 아버지들에게 허하라
박범신 '아버지의 평화'에 대한 단상
‘빈 논바닥에서 못자리를 지어내는 부지런한 평화, 버려진 들녘도 남모르게 찾아가는 혈족 같은 사랑의 평화, 밤새워 물꼬를 보거나 피사리를 하거나 김을 매던 건강한 노동에 기댄 평화, 하늘과 조상께 감사 올리기를 잊지 않고, 고댄 육신은 꿀맛 같은 막걸리 한 사발로 녹여내는 순정적이고 건강한 평화가 겨울 들녘에 서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담겨 있었다.’
앞에 소개한 인용문은 박범신의 단편소설 ‘아버지의 평화’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작가가 1974년에 발표했으니, 세상에 나온 지 50년도 넘은 작품이다. 어지러운 세상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노승찬이다. 그의 가족은 전라북도 익산이 고향인데, 시골살이는 풍족하지 않지만 원만했다. 그런데 집안 논 주변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가족의 운명이 바뀌었다. 공장 주인이 논을 팔라고 청했는데, 아버지는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런데 주변 모든 땅이 공장주에게 팔리면서 더는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그 논을 팔았고, 농사에 의욕을 잃어 남은 땅까지 모두 팔았다.
그리고 시작한 사업, 삼촌과 동업으로 미곡상을 했다. 그런데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더니 동업하던 삼촌이 모아둔 쌀을 들고 도망쳐버렸다. 빚쟁이들이 달려들었고, 미곡상은 부도가 났다. 아버지는 사기혐의로 입건돼 유치장에 수감됐는데, 수감 도중에 발작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풀려났지만 집안은 거덜 났고, 어머니는 일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쳤다. 서울 변두리 판잣집 생활이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로 처음 이사했을 때 어린 동생 승혁이는 “이게 뭐여? 가자. 시골집에 가자.”하며서 보챈다. 노승찬은 마음속으로 ‘나도 인마, 미치게 가고 싶단 말여!’라고 답한다.
어머니와 여동생 승순이는 공장에서 품팔이를 했는데, 그걸로는 입에 풀칠도 어려웠다. 게다가 실성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매질을 일삼았다. 집이라지만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승찬은 집에서 나와 맥주홀의 웨이터로 일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집을 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입영통지를 받았는데, 그 즈음에 동생에게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승찬은 군에 입대한 지 8개월 만에 베트남 전장에 지원했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뛰어난 공을 세운 덕에 훈장도 받고 보름도안 휴가도 얻었다. 그렇게 포상휴가로 집에 왔지만, 여전히 가난이 가족을 지배하고 있었다. 여동생 승순은 방직공장에 다니다가 병까지 얻었다.
노승찬 일병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묻힌 공동묘지를 찾았는데, 묘지는 이미 아파트 개발 현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노 일병은 아직 아버지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무덤을 뒤졌다.
노 일병은 묘지 앞에 서서 서두에 소개한 것처럼, 아버지가 농촌에서 평화롭게 생활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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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버지의 평화’은 세상이 나온 지 오래됐고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품인데, 다시 꺼내 읽은 이유가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 평화를 잃고 떠도는 아버지들이 너무 많아진 것 같아서다.
많은 아버지들이 추운 겨울, 아스팔트에서 ‘사기 탄핵’을 막아보자고 외친다. 스스로 애국시민이 되어서 선관위와 헌법재판소를 접수할 태세를 보인다. 제 몸에 불을 지피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 아버지들의 타오르는 열기에 비하면 한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들이 평화를 읽고 떠도는 게 고향을 잃어버려서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자식 뒷바라지를 마쳤건만, 어느 순간 갈 데도 오라는 데도 없어진 아버지들의 마음에 평화가 자리 잡을 수 있겠나? 할 일도, 찾는 사람도 없는 아버지에게 건강한 노동에 기댄 평화가 있겠는가?
아버지들에게 유튜브 알고리듬 말고, 고향을 돌려줘라. 거기에 겨울 들녘, 건강한 노동, 고댄 육신을 녹여내는 막걸리 한 사발이 주는 평화가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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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욱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