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성산포를 뒤집은 ‘정의면 씨름사건’을 아십니까
[아카이브 정의면 씨름사건] ① 사건 알리기를 시작합니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바다를 일터 삼아 생활을 영위했다. 그런데 1883년,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재조선국 일본어민통상장정’을 제주 어민의 생활은 큰 위기를 맞았다. 협정을 근거로 일본 어민은 조선의 근해에서 어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무분별한 어업 침탈로 제주도 어장의 전복과 해삼류를 남획했다. 1890년대 이후 제주도의 어장은 황폐화되어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런 와중에 1927년 5월 16일, 제주도 성산면 청년들과 일본 어민들이 무력으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씨름대회에서 벌어진 사건이라서 ‘성산포 씨름사건’ 혹은 ‘정의면 씨름사건’ 등으로 불린다. 정의면은 당시 제주도의 동남부를 아우르는 행정구역이었다. 사건은 오래도록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는데, 사건 100주년을 앞두고 이 일을 제대로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9일에는 성산포수협 어업인복지회관에서 ‘제주성산면 씨름대회 항일운동 상징적 의미 재조명과 과제’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위성곤 국회의원과 제주도의회가 행사를 공동 주최했다.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박찬식 관장이 이날 주제발표를 했는데, 발표문에는 당시 사건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 사건의 전개과정, 당시 신문기사, 재판기록물 등 소중한 자료가 많이 포함됐다.
박찬식 관장은 “일제의 어업 침탈에 맞선 항일투쟁이 제주 성산포 씨름대회를 계기로 폭발했다.”라며 “고은삼 등이 이끄는 500여 명의 제주도민이 약 200명의 일본어선 관계자 및 한국인 고용인들을 공격해 섬 밖으로 내쫓았다.”라고 밝혔다.

‘정의면 씨름사건’은 1927년 5월 16일 제주도 정의면 중앙청년회(회장 고은삼)가 주최한 대운동회에서 지역 청년들과 일본 어민들이 충돌한 사건이다. 당시 풍랑을 피해 성산포로 대피했던 일본 선원들이 씨름장 주변으로 몰려들어 제주 청년들과 씨름을 했고, 그 과정에서 차별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씨름경기에서 패한 일본인 어부가 심판을 보던 정의면 청년의 뺨을 때렸는데, 이에 정의면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격분한 500여 명의 정의면 청년과 200여 명의 일본 어부(일부 외래인 포함) 사이에 집단 싸움이 벌어졌고 수세에 몰린 일본인들은 줄행랑을 쳤다. 화가 풀리지 않았던 정의면 청년들은 숨어있는 일본인들을 색출해 추가로 폭행했다.
결국 경찰이 출동해 사태를 진압했다. 청년과 어민 52명이 체포되어 경찰서로 압송된 후 50명이 재판에 회부됐는데, 21명이 징역 1년에서 1년6월의 징역 형을 선고받았다.

박찬식 관장은 발표 말미에 이 사건과 관련해 조사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해 추가자료를 발굴하고 지역 구술자료를 확보하고 사건이 독립유공자 선정 기준에 부합하는 적격성을 갖출 수 있도록 자료를 추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시민독립언론 「서귀포사람들」은 ‘정의면 씨름사건’이 지역민이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임을 자각하고 발제자가 제공한 자료를 기반으로 사건을 대중에 알리는 연속기사를 발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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