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다 보리밥열매, 눈앞에는 다닥다닥 조각보 같은 농경지

[김미경의 생태문화 탐사, 오름 올라] 마른 섬에 물을 품은 오름들(20) 단산

오르기 전부터 위엄과 장엄함을 느끼게 하는 오름

368개의 오름 중에서 특별한 오름이 있다. 형태나 그 오름을 형성하는 지질의 특별함이다. 바위산이라고 오르는 이곳은 어쩌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아주 오래전 물과 뜨거운 용암이 만나 분출한 화산쇄설물들이 오랜 기간 쌓이고 다져지면서 만들어졌다. 특별하다고 유명하다고 꼭 올라 봐야 한다고 해서 오르게 되지만 많은 사람의 발길로 남겨진 생체기 때문에 먼 훗날 사람들은 아마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미리 대비하여 이곳을 잘 살피는 것도 중요할 듯하다.


▲ 남쪽에서 바라본 단산. 유채가 노랗게 꽃을 피웠다.(사진=김미경)

단산의 산세로는 3개의 높은 봉우리를 이야기하지만, 보는 위치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외형이다. 북쪽에서 바라본 단산의 여러 능선과 봉우리는 오르기 전부터 이곳의 위엄과 장엄함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단순하지 않아 경관미도 한몫하는 셈이다.

10여 개의 동굴 진지와 희귀하고 아름다운 꽃들

탐방로를 안내하는 서쪽 입구는 급경사이기도 하고 식생들이 풍성해지는 여름에는 관리가 잘 되지 않아 데크 안에 들어앉은 풀들로 이곳을 걷는 이들의 불평을 자아낸다. 이곳을 걸을 때 탐방로의 경사가 급하여 힘이 들지만 그만큼 다양한 볼거리도 있다. 중간엔 일제강점기 만들어 놓은 진지동굴도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10여 개의 진지동굴이 있다고 한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도 다시금 새겨 보게 된다. 조금 더 편한 길을 원한다면 4.3 피해 사찰이었던 단산사 옆으로 오르는 길을 선택지로 하면 좋을 듯하다. 이곳 초입에는 1963년 산림청에서 인성리 시범조림지라는 비석도 확인 할 수 있다.


▲ 단산을 오르며 만난 식물들. 왼쪽은 솔잎난/ 오른쪽 위는 보리밥나무/ 오른쪽 아래는 산자고(사진=김미경)

어떤 생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특별한 감흥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알고 나면 보이는 것이 새롭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이곳에서 오르기 시작하여 머무르게 되는 퇴적암, 바라보이는 풍광은 이곳 인성리와 사계리 사람들의 삶을 느끼게 한다. 봄이 오는 어느 날, 이곳의 ‘산자고’는 퇴적암의 바닥에 납짝 엎드려 찾아오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아찔하기까지 한 이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우뚝 솟아오른 바위틈에는 귀한 솔잎난(#멸종위기2급)이 자라고 있기도 하다. 꽃과 씨앗을 만들지 않고 포자로 번식하는 양치식물이다. 홀씨주머니가 노랗게 익을 즈음 마치 꽃이 핀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쁘게 보이길래 난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바위틈에서 용출하는 샘물, 추사도 반한 물맛!

가파른 바위를 오르고 내리는 이곳에는 곰솔과 잡목들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 보리밥나무들이 발길 닫는 데마다 보이고 토종 동백나무도 꽃을 피워 오르미들을 맞이한다. 능선 사이사이에 하늘이 활짝 드러나는 곳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멋도 있으리. 중간 봉우리에 도착하기 전 마주한 이대(제주어로 족대) 군락의 만남은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선사할 수도 있다.


▲ 단산 정상에서 볼 수 있는 풍광. 단산의 응회암 사층리 구조(왼쪽 아래)가 드러나고 이대가 군락(오른쪽 아래)을 이룬다. 그리고 대정과 안덕의 농경지 너머 푸른 바다가 훤히 내다보인다.(사진=김미경)

정상은 생각보다 넓은 쉼 공간을 선사한다. 동서남북이 확 트여 저 멀리 한라산과 산방산, 최남단 마라도와 가파도, 형제섬, 모슬봉 등이 보이는 시야에 힘들게 오른 만큼 또 다른 기쁨을 주지 않나 싶다. 다양한 색깔들로 펼쳐 놓은 듯한 조각보 같은 농경지의 모습은 더없이 평화롭기까지 하다. 동 봉우리는 다른 봉우리보다 경사가 급하고 의지할 데가 거의 없는 곳이다. 웬만하면 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단산 서쪽 기슭 바위틈에서 용출하는 샘물이 있다. 세미물, 돌세미, 바곤이세미라고 부른다. 인성리 사람들은 식수원으로 사용하였다. 대정향교는 깨끗한 물이라 여겨 제사 때 이 산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특히 추사 김정희가 유배 당시 유독 애착을 가졌던 산물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유배지인 제주 섬에서 차를 마시며 외로움을 달랬는데 유배가 풀려난 후 섬의 석천의 물소리가 그립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인근 농경지에 호수를 연결해 농업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단산’, 바위 벼랑이 심하고 산등성이가 평평한 오름이라는 뜻

탐방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단산이니, 바굼지오름이니 하는 지명을 다시금 곱씹어 본다. 단산(簞山)의 ‘단(簞)’이라는 글자가 광주리 혹은 바구니를 뜻하는 글자라서 그랬는가 이 오름의 모양이 바구니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풀이한다. 어떤 이는 바굼지가 제주어로는 바구니를 뜻한다고 하여 이런 주장을 힘주어 얘기한다. 또 어떤 이는 바굼지가 제주어로 박쥐를 뜻하는 바구미에서 온 말이라면서 박쥐를 닮아 붙은 이름이라고 말한다. 사실 멀리서 가까이서 아니면 정상을 탐방하는 내내 둘러봤지만, 이런 설명과 어울린다는 느낌은 없다.


▲ 세미물. 과거 안성리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다.(사진=김미경)

그러나 실은 ‘바구’, ‘파고’, ‘파구’ 가 ‘바위 벼랑’의 뜻이라고 한다. ‘산’은 등성이가 평평하다는 뜻의 ‘마루’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고대어라서 국어사전에는 나오지도 않는 말이라고 하니 헷갈릴 만도 하다. 제주도 사람만 쓰는 이런 말의 뜻을 몰랐던 기록자들이 한자를 빌려 쓰는 과정에서 나온 글자들이 단산 같은 지명을 낳은 것이다. ‘단산’, 바위 벼랑이 심하고 산등성이가 평평한 오름이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단산(바굼지오름,파군봉)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31241번지 일대
표고 158미터 자체높이 113미터


김미경
오름해설사, 숲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다. 오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단법인 오름인제주와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사무국장으로도 열심이다. 한림북카페 책한모금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개인 블로그를 통해 200여 편의 생태문화 관련 글과 사진을 게재해 왔다. 본 기획을 통해 수많은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마당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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