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고 온 코빼기화전.. 김씨는 항일운동, 이씨는 대형목축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53) 영남동 화전민(3)
서귀포시 영남동은 과거 화전민이 살던 마을이며, 주변에 판관화전과 코빼기화전을 위성화전으로 거느리고 있었다는 걸 앞서 기사에서 기술했다. 1880년대 중반에 김 씨 일가가 판관화전에 들어갔는데, 이들은 1910년 중반 이전에 영남동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영남동으로 이주한 화전민들은 제주4·3 과정에서 큰 화를 입었다.
■ 코뻬기 화전
영남동 495번지와 496번지 및 488-494번지 일원에 사람이 살았다. 1914년 원지적에 지번이 부여된 사실이 확인되는데, 4년 뒤 만들어진 「1918년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에는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각각 두 채씩 모두 여섯 채의 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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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p32-33에는 ‘산록도로가 뚫리고 있는 위쪽 약 1km 쯤에 코뻬기마을이 있었고, 김 씨 집안 세 가구가 살다가 후에 영남동으로 내려오게 됩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p35에는 법정사무장항일운동 애국지사 김두삼(당시25세)의 주소가 영남동 495번지로 나와 있다.
이 책 p36에는 그의 조카 김종원(1935생)은 자신의 부친 일가의 호적이 영남동 495번지로 되어 있다고 증언했다. 2019년 12월 현장을 찾아 확인했는데, 495번지에는 집터 흔적이 안 보이고 496번지에 언덕에 집 두 채가 있던 자리에 땅이 파진 곳이 있었다. 496번지는 용흥동 목축지의 국림담 웃자락에 해당하는 곳이다. 1930년대 집터에서 불과 40m 떨어진 곳에 국림담을 만들어질 때, 인부들이 김두삼의 집 돌담을 모조리 가져다 국림담 잣담으로 쌓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4년 지적원도에서 495번지를 확인해 보니 김천년(金千年)이 살았던 게 확인됐다. 그의 작은아버지가 김두삼이고 손주는 강정동 김종원이다. 김종원은 자신의 고조부가 노형동에서 살다가 코빼기화전으로 들어왔고 부친은 영남동에 살았다고 증언했다. 김종원의 부친은 코빼기화전에서 영남동으로 이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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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삼은 25세에 항일운동에 참여했으며 목포형무소로 끌려가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일가는 김두칠, 김두행이다. 이들 가족은 영남동에 거주했다.
꼬뻬기화전 중 영남동 493번지 일원에 김 씨와 이 씨 집안이 살고 있었다. 필자의 『제주4‧3시기 군경주둔소 : 2019』를 보면 이곳은 제주4‧3 이후 ‘어점이주둔소’가 만들어져 경찰토벌대들이 머무는 장소로도 이용됐다. 지금은 김 씨 집안의 묘소로 변해 있다.
이곳 뒤로 우마들이 다니던 길이 어점이오름 북서쪽으로도 이어져 ‘개발단’이 들어와 1956년까지 모슬포 제1 훈련소에 밥을 할 나무를 실은 트럭이 지나가기도 했다. 화전지엔 과거 사람들이 이용했던 깨진 그릇들이 냇가 곁에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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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증언총서 제5권 『옛날 살아온 말 곧젠허민 기가 멕히지』p232에는 이상진 가족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상진(1935생)의 조부(이기순)가 전라남도 해남에서 코빼기화전으로 이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주지인 영남동 494번지에는 조부에 이어 부친이 살았다. 서귀포시 용흥리에 거주하는 이상진의 아내(김O순, 1949생)에게 확인해 보니, 이상진의 부친은 이봉하이고, 할아버지는 이기순이다.
가계도를 보면 조부 이기순은 자녀 9명을 낳았고, 아버지 이봉하는 딸과 아들 한 명씩을 낳았는데, 아들이 이상진이다. 이후 가족들이 영남동에서 제주4‧3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상진이 1935생이니 2세대를 거슬러 40~50년을 더하면 조부는 188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조부는 일제강점기에 494번지에 들어 왔으며 토지조사 사업이 이뤄지기 전에 살다가 지번을 부여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 땅은 김 씨 소유로 변했다. 이상진의 구술에 따르면, 조부(이기순)는 100여 두의 우마를 키웠으며 돈을 벌어 해안마을 지역에 땅을 사들려 자녀에게 수천 평씩 나눠줬다. 이기순이 법정사무장항일운동에 참여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 「남원읍 화전민 이야기」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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