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소리에 깨어난 꽃, 숲속 어느 사슴의 뿔이 이토록 화사할까?
[주말엔 꽃] 새섬 맥문아재비
1945년 8월 15일 여름 날씨도 요즘처럼 뜨거웠을 것이다. 말복 즈음의 태양이 뜨겁기도 했을 터인데, 해방의 감격까지 더해지니 거리의 열기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네 민초는 늘 뜨거운 열기를 삼키며 살아야 할 운명을 타고났다.

15일 서귀포항을 찾았다. 태양이 뜨겁기는 한데, 모처럼 열린 파란 하늘을 그대로 보내기엔 너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도 없고 바다 물결마저 잔잔해, 유람선을 타고 서귀포 바다를 둘러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유람선은 하루 두 번 출항하는데, 두 번째 출항이 오후 2시에 끝이 났다. 배 시간을 놓쳐 바다 유람은 포기했고, 나온 김에 새섬이나 둘러보기로 했다. 맑은 날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축복을 받으며 작은 숲속을 산책하는 것도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니다.

새섬은 3만 평 남짓한데, 절반가량은 숲이고 나머지는 판판한 바위가 그대로 노출되는 암반지대다. 해송이 전체적으로 숲을 점령하는데, 그 사이에 아왜나무, 멀구술나무, 먼나무, 팽나무, 까마귀쪽나무, 예덕나무, 대나무 등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산책로를 지나다보면 푸른 하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해송을 연이어 만나게 된다. 조금만 허리를 낮추면 나무 아래 그늘에서 난초와 모양이 비슷한 풀이 지표를 덮고 있는 게 보인다. 푸른 잎을 길게 펼쳤는데, 길쭉한 꽃대 끝에는 하얀 꽃들이 대롱대롱 붙어있다. 제철을 맞은 맥문아재비 꽃이다.
‘아재비’는 경상도와 함경도에 숙부를 이르는 지역어다. 이모부나 고모부에게 아재비라 부르기도 한다. 마니라아재비, 김의털아재비 등 식물의 이름에 ‘아재비’가 붙는 경우가 있다. 맥문아재비는 외양이 맥문동과 비슷해서 붙은 이름이다.

맥문아재비는 백합과 여러해살이풀로 제주도를 포함해 우리나라 남부지역에 분포한다. 잎은 춘란의 잎처럼 짙은 녹색인데 광택이 있다. 길이 70센티미터까지 자라는데, 잎에 10개 남짓 잎맥이 있다.
물빠짐이 좋고 습한 환경을 좋아하는데, 햇빛이 너무 센 곳에선 잘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숲 안과 같이 햇빛이 부분적으로 비치는 곳, 그늘이 연한 지역을 선호한다. 햇빛이 세면 생장이 멈추기도 하고 잎이 타버리기도 한다. 영하 5도씨 이상인 곳이면 적응할 수 있다.

뿌리줄기를 뻗으면서 개체를 늘리는 방식으로 번식한다. 새섬의 그늘진 부분을 맥문아재비가 덮고 있는 것처럼, 환경만 맞으면 빠른 속도로 개체를 늘릴 수 있다.
꽃대는 30센티미터가 넘을 정도로 길쭉한데, 그 끝에 꽃차례를 만든다. 꽃차례에서 꽂자루가 돋고 꽃덮개가 맺힌 모양이 마치 콩나물을 닮았다. 꽂자루는 1~2센티미터, 꽃덮개 폭은 5밀리 안팎이다. 꽃은 꽃잎처럼 갈라져 암술과 수술을 노출한다. 꽃은 바로 서기도 하지만, 꽃대가 길고 꽃차례가 무겁기 때문에 옆으로 기울어지는 게 많다. 열매는 즙이 많고 속에 씨가 들어 있는데, 8~9월에 푸른 자주색으로 익는다.
남태평양에서 몰려오는 파도와 바람이 닿는 곳. 그 거친 환경에 해송이 숲을 이루고 그 안에 맥문아재비를 품었다. 어느 사슴의 뿔이 맥문아재비 꽃처럼 화사하고 화려할까? 버려진 땅에서 화려한 꽃을 피워낸 풀, 우리 섬사람들의 운명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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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욱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