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우리 흔적만 남은 상문리 민모르 진씨 화전가옥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67) 중문동 상문리화전

국가기록원 자료를 분석한 결과, 1914년 상문리 화전 지역에는 47호가 살았고 이들은 밭 149필지, 임(林) 여섯 필지를 소유했음을 확인했다. 그 중 여섯 가구가 민모르화전에 살았다.

■ 민모르화전

민모르화전은 중문동 1∼17번지에 있던 화전이다. 민모르오름 남쪽에 자리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이 일대에 한라산둘레길인 ‘거린사슴둘레길’이 조성됐는데, 둘레길 주변에서 산전 돌담들과 ‘살레왓(계단식밭)’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몇 해 전까지는 둘레길이 사유지를 지났는데, 지금은 대나무와 화전밭이 있던 지역은 통과가 어렵게 됐다.


▲ 민모르화전에 남은 김원백의 집터 자리. 중문동 3번지에 해당한다.(사진=한상봉)

예전 민모르화전은 거린사슴오름 근처에 있는 윤못화전지를 지나야 다다를 수 있었다. 이후 이곳엔 일본인이 운영하는 표고장이 들어섰다. 제주4·3 이후에는 서귀포 출신 장○연이 표고밭을 운영하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 운영하고 있다.

1914년 지적원도를 확인해 보니 모두 여섯 가구가 밭 11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중문동 3번지에 김원백(金元伯)이 살며 중문동 1, 2, 4번지 밭을 소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은 중문동 5번지에,  박을석(朴乙石)은 8번지에 거주했다. 박을석은 중문동 6, 7번지 밭을 소유했다. ○상용(○相龍)은 중문동 11번지에 살며 10번지 밭을 소유했다. 고○○(高○○)은 중문동 12번지에 살며 14번지 밭을, 진사만(秦四萬)은 중문동 16번지에 살며 15, 17번지 밭을 소유했다.

여섯 가구 중 김원백은 현 중문동에 거주하는 김○현의 큰아버지다. 고조부는 세벨리(사계리) 출신이다. 이후 증조부가 산방산 북쪽 덕수리 ‘곤물’이라는 곳에 정착을 했는데, 가계가 기울었다. 증조부는 아들 용이를 데리고 민모르 남쪽 중문동 3번지에 이주하였으며 중문동 1, 2번지 밭을 개간하여 담배 연초, 지슬(감자) 등을 재배하고 살았다.

1918년 지도를 보면 이 지역에 표고장 집 한 채와 또 다른 집 한 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본다면 1914년에서 1918년 사이 표고장이 들어서며 기존 화전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최소 네 가구는 이주한 것인데 토지조사사업의 여파가 자못 컸다는 걸 보여준다.

김○현은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 할아버지 김용이와 큰아버지 김원백, 부친 김원석 등이 중문동 3번지에 함께 살았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강정동으로 미리 내려갔고, 후손이 없어 자신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증언했다. 중문동 3번지의 땅도 본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 민모르화전 중문동 14전지 고OO 집터에 남은 도기 조각(사진=한상봉) 

김○현은 중문동 3번지에서 아버지가 태어났고 자신은 가족이 1938년 녹하지오름 북쪽으로 이주해서 살 때 태어났다고 했다. 가족은 1947년 섯단동산으로 이주한 후 이듬해 제주4·3을 만나 중문동으로 이주했다.

진사만(秦四萬)이 살았던 중문동 16번지 현장을 보니 당시에 살았던 집터는 사라졌고 둥근 형태의 돌담이 남아 있다. 돼지우리로 추정되는데, 허물어진 돌담사이에서 항아리 조각이 발견됐다. 김○현은 기억에 의거해 필자에게 진사만이 애월읍 동귀리로 가 살았다는 얘기를 했다. 이에 후손들을 추적해 족보를 확인해 보니 진은환이 진영식, 진영주를 낳았고 진영식의 후손은 진사만 - 김천년 - 진창실로 이어진다. 진영식은 원래 자식이 없었는데 동생 진영주의 장남 진사만을 입적해 가계를 잇게 했다. 진영주의 차남 진기만의 후손은 진○언 - 진○경으로 이어진다.

증조 진영주(1857생)의 묘가 녹하지오름 북동쪽 ‘절터왓(사기원, 寺基員)’에 있고, 아내 박씨(1865생)의 묘가 ‘섶산이’에 있다. 지금도 후손이 벌초를 하고 있다고 하니, 화전 인근에 묘를 모셨음을 알게 한다.


朴乙石(박을석) 집터를 확인해보니 집터는 묘소로 변해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주변에 표고장이 운영됐고 제주4·3이 끝난 후엔 장 씨 표고장이 들어서 운영됐기에 지금도 당시 표고장 돌집이 옛 둘레길가에 남아 있다. 이 표고장 돌집을 제주4·3 관련 주둔소로 오판하는 기사가 ‘한라산둘레길에서 4·3주둔소 확인’이란 기사로 보도되기도 했다.

나머지 민모르 화전민들은 어디로 이주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중문동 절터왓
 절터왓은 중문동 90번지에 있는데, 100여 년 전 중문동 지한택 씨의 누이동생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 마련한 곳이다. 지역민들은 지금도 절터라 부른다.
 중문동 고○진(1946생)은 인근 ‘움텅밧’에서 목축에 종사할 때 이곳 절터에서 기도를 드리던 보살로부터 돌담을 쌓아 달라는 부탁을 들었다. 이에 ‘움텅밧’에서 쉐를 돌보던 지인 여섯 명과 하루 반나절에 걸쳐 돌을 쌓아 집터를 조성했고, 신단을 그 안에 만들어줬다 한다. 당시 기도터 재단 축조를 부탁한 보살은 중문사람이 아닌 제주 서부지역 보살이었으며 만든 시기는 자신이 25세 이후라고 했다. 1971년이다.
 볼레오롬에서 존자암이 이설됐던 터라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 존자암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축조한 사람들이 나타남으로 인해 존자암과는 관련이 없음이 확인됐다. 또한, 망치로 돌을 타격한 부분이 있어 존자암 이설과는 관련 없음을 알 수 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 「남원읍 화전민 이야기」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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