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성을 본 따서 별장 지은 게 화근, 추방된 의사 가족의 기구한 운명
[강원도 기행] ④ 고성 화진포 김일성 별장
강원도 고성군은 분단과 한국전쟁의 흉터가 가장 많이 남은 지역이다. 3.8선은 강원도 양양군을, 휴전선은 고성군을 가른다. 고성군은 해방 이후 북한 정부 치하에 놓였고, 전쟁 기간 공방이 오가는 기간에는 번갈아가며 유엔군과 북한군 세상이 됐다. 해방과 전쟁을 고성군이 어떻게 겪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흔적이 고성군 현내면에 있는 김일성 별장이다.

현내면 화진포 주변에는 김일성 별장,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 등이 있다. 권력을 자랑하던 사람들의 별장이 이곳에 몰린 것을 보면 화진포의 절경이 세상에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별장은 화진포 해수욕장이 내다보이는 소나무 숲 언덕위에 잡았다. 최고 수령 80년에 이르는 높은 금강송이 별장 주변을 감싸고 있다. 소나무 숲 언덕길을 걸어 올라야 별장에 닿을 수 있다. 길게 펼쳐진 인근 해수욕장에서 사람들이 물놀이하는 중이었다.
김일성 별장이라고 해도 김일성이 이 건물을 사용한 기간은 1948년부터 1950년까지 2년이라고 한다. 김일성 가족이 이곳에 머물렀을 때 촬영했다는 조그만 사진이 있기는 한데, 실제로 별장을 사용했던 게 몇 차례 되지 않을 것이다. 평양에서 현내면까지 거리도 짧지 않다.

이 건물의 주인은 의료선교를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셔우드 홀(Sherwood Hall,1893~1991) 박사다. 홀 가족은 조선 말기부터 대를 이어 조선에서 의료선교를 펼쳤는데, 그 가족이 사용했던 별장을 잠시나마 김일성이 차지했던 건 씁쓸한 일이다.
모친 로제타(Rosetta Sherwood Hall)은 미국에서 태어나 1889년 펠실베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이듬해 미국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 소속으로 조선땅에 발을 들였다. 부친 윌리엄(William James Hall)은 캐나다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로 의사가 되었다. 윌리엄은 1891년 말에 감리교 평양선교기지 개척 책임자로 조선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조선에 들어오기 전부터 연인 사이였다. 이들은 1892년 6월 조선에서 결혼하고 조선에서 의료선교를 펼쳤다. 그리고 1893년 11월에 아들 셔우드가 출생했다. 그 아기가 훗날 조선에서 의료활동을 펼치고 화진포 주변에 별장을 세운 셔우드 홀이다.

그런데 가정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쳤다. 우선 조선에서 의료활동을 펼치는데 지방 관아가 사사건건 방해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가족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한양과 평양을 오가는 가운데도 혼신을 다해 의료활동을 펼쳤다.
그런 와중에 부친 윌리엄은 환자를 돌보다 병을 얻었고, 1894년 11월 사망했다. 그리고 남편이 떠난 지 3개월 만에 로제타는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디스(Edith Margaret Hall)라 지었다. 그런데 이디스도 1898년 이질로 세상을 떠났다.
로제타는 낯선 조선에서 남편과 딸을 먼저 보내고 큰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의료선교를 향한 그녀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서울에 와서 동대문부인병원(현 이화여자대학부속병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부속병원)및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인천분원(현 인천기독병원)을 창설했다. 김점동이라는 여성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의학교육을 시켰다. 김정동은 훗날 박에스더라 불리는데, 의학공부를 마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셔우드 홀 박사의 의료활동은 고스란히 어머니의 열정을 이어받은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 캐나다의 토론토 의대에서 공부하고 부인 메리언과 함께 감리교 선교사가 되어 1926년 조선에 들어왔다. .
셔우드 홀은 황해도 해주에 폐병요양병원을 세우고 의료활동을 펼쳤다. 1932년부터는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환자들을 돕기도 했다. 그가 폐결핵에 특별히 관심을 모은 건 어머니가 친동생처럼 여겼던 박에스더가 폐결핵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셔우드 홀 별장이 세워진 건 중일전쟁과 관련이 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원산에 있던 외국인 휴양촌을 화진포로 옮기도록 했다. 일제는 1940년에 원산항공대를 창립하고 원산갈마비행장을 주둔기지로 활용했다.
당시 원산은 조선 제일의 해수욕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1930년대는 억압의 시대였는데, 해수욕장에선 누구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일제는 관광업을 육성하기 위해 적극 나섰는데, 유명 해수욕장에 갈 수 있도록 철도를 놓아 사람을 실어 나섰다. 그런데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휴양지 원산은 명성을 잃었다.
셔우드 홀 박사는 독일인의 손을 빌려 이곳에 별장을 짓고 ‘화진포의 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셔우드 홀은 인근 화진포 호수에 반해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에 비길 만하다고 극찬했고, 사비를 들여 유럽의 성을 연상케 하는 건물을 지었다.

그런데 이게 건물이 화근이 됐다. 당시 일제는 고도 20미터 이상을 촬영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곳에서 촬영한 동해안 사진을 가진 게 일제에게 발각됐다. 셔우드 홀은 1940년에 재판을 받았는데. 큰 벌금을 내고 아내와 함께 외국으로 추방됐다.
그는 인도에서 폐결핵 치료를 헌신하다가 1963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92년, 한국에 들여와 부모의 묘가 있는 양화진에 묻혔다.
셔우드 홀 박사가 1937년에 건물을 지었다면, 이곳을 사용한 기간은 3년에 불과하다. 해방 이후 북한은 이 건물을 귀빈 휴양소로 사용했는데, 김일성 가족이 남긴 사진이 있어서 ‘김일성 별장’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국전쟁 이후 이곳에 수북지역이 됐기 때문에 김일성 역시도 별장을 오래 사용하지 못했다.
건물은 전쟁 중에 크게 훼손됐다고 한다. 2005년에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결국 화려한 건물인데, 제대로 사용해본 사람도 없이 그저 역사의 증언자로 고성 화진포 해안을 지키고 있다.
** 새마을문고 서귀포시지부가 기획한 '길 위의 인문학 투어'에 참가했습니다. 행사를 마련해준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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